지금 그 정확한 영역, 혹은 중심지가 논란인 위만조선이 존재하던 무렵, 중국 남방 지금의 광동성 광주 일대에는 남월南越이라는 왕조가 존재했다. 이 남월은 여러모로 위만조선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하는 판박이다.
첫째, 위만조선이 중국계 연燕나라 망명객인 위만이라는 자가 수립한 왕조이듯이, 남월 역시 지금의 산동성 출신인 조타라는 자가 현지 관리로 파견되어 일하다가 그 자리에서 자립해 이룩한 왕조 국가다. 둘째, 그런 까닭에 위만조선이나 남월은 모두 현지인과 중국계 이민자들의 혼합 정권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하이브리드 왕조인 셈이다.
셋째, 그 성립 시기 역시 거의 같다. 두 왕조 모두 시황제에 의한 진秦 제국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붕괴하면서 우후죽순으로 그 영역 혹은 주변부에서 생겨난 독립정권들 중 하나다. 이들이 왕국을 이룩하고 왕을 자칭한 때는 대략 기원전 200~기원전 190년 무렵이다.
넷째, 멸망 과정 역시 시점까지 거의 겹친다. 북방의 패자 흉노와의 일전을 벌이던 한漢 무제武帝는 한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주변부 제국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의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게 되거니와, 그 와중에 한 제국에 고분고분하지 않다 해서 먼저 남월을 멸滅한 직후에 곧바로 그 주력군을 그대로 위만조선 정벌에 전용해 멸망시켰다.
다섯째, 이들을 멸한 직후 통치 방식 역시 일란성 쌍둥이다. 다만 국력과 영역에 차이는 있었던 듯, 남월국에는 7군郡을 설치한 데 견주어 위만조선 영역에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설치하니,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이다.
이쯤이면 위만조선과 남월국은 서로에 대한 투사물projection이라 해도 전연 과장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런 점들에서 그 정확한 영역은 물론이고 중심지조차 알 수 없는 위만조선을 둘러싼 여러 의문점들을 해명하는 키 포인트들을 다름 아닌 저 광동성 광주의 남월국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위만조선과 달리 남월국은 발굴조사를 통해 첫째, 그 중심지가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임이 드러났고, 둘째, 그것을 증명하는 무수한 궁성 유적과 왕릉, 그리고 심지어 방파제 시설인 수갑水匣 유적까지 발견됐으며, 셋째 이를 통해 그들이 향유한 유물들의 실체 또한 상당 부문 베일을 벗었다. 그들이 사용한 집기 용기 무덤 집자리 등등이 그 실체가 여전히 온통 오리무중인 위만조선에 견주어 대부분 물질자료로써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까닭에 위만조선, 혹은 그 땅에 설치되었다는 낙랑군 문화를 보려거든 나는 서슴없이 광동성 광주로 달려가라고 외쳤다. 이렇게 외친지 물경 10년이 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없다가 근자에서야 한두 사람 눈에 띠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한다. 광동성 광주에서 드러난 그와 똑같은 형태의 유구와 유적과 유물이 위만조선에서도 튀어나와야 한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지상명령이다. 왜? 위만조선과 남월은 서로에 대한 투사요 일란성 쌍둥이며 판박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May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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