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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가 보는 위만조선과 낙랑》(4) 마왕퇴에서 생각한 위만의 무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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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봉직하던 최몽룡에게는 회갑인 해였다. 그는 본교 제자도 많았지만, 고고학 전담 교수가 없는 다른 대학에서도 지도한 외곽 제자도 만만치 않았으니, 백제를 필두로 하는 역사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 주류성 사장 최병식도 그런 사람에 해당한다.

백제에 미쳐, 특히나 그 마지막 왕 의자의 신이 강림했다고 믿는 최병식은 형제들이 모두 박사학위가 있는데 장남인 자신만은 없다는 점을 못내 한스러워해 50대 늦깎기로 두 대학에 석박사로 등록해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이 과정에서 불과 5살 정도 많을 뿐인 최몽룡의 제자 그룹에 들어간다.
 

마왕퇴 한묘 3호묘 현장

 
최몽룡이 환갑을 맞은 그해 9월, 최병식은 선생의 환갑 선물로 중국 여행을 준비한다. 기간은 대략 4박5일 정도 되었다고 기억하며, 여행지는 호남성 장가계였다. 공부하는 답사 여행은 안 하고 싶다는 뜻을 반영해 뛰어난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장가계를 고른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나 마침 그때만 해도 하나투어에서 장가계 여행상품을 파는 전세기를 하루에 한 대 띄우던 시절이었다. 이 여행에 나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당시 갓 퇴직했는지 아니면 퇴직할 무렵이었는지에 해당하는 신형식 교수와 함께 초청받아 참가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 편집위원이었으니, 이 자격으로 간 것이다. 다녀와서 관련 글을 한 편 써서 잡지에 투고한 기억이 있다. 최몽룡도 그랬다.
 
이에 대해서는 이곳저곳에서 두어 번 긁적거렸지만, 최몽룡이나 나나 천성이 즐기는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기어이 학술 답사로 변질하고 말았으니, 이 여행 상품에 낀 장사시 호남성박물관에서 말로만 듣던 화려찬란한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 출토유물을 보고는 그만 환장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행단을 몰래 빠져나와 장사를 출국하던 그날 새벽 일찍 일행은 마침내 택시를 대절하고서는 마왕퇴 한묘 발굴현장으로 갔다.
 
무령왕릉 발굴 직전인지 직후에 동시에 발견된 마왕퇴 한묘는 그 발견과정이 무령왕릉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마침 그 직전 도서출판 일빛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 발굴기인 중국 고고전문 작가 웨난의 《마왕퇴의 귀부인》에서 선명하게 그려졌거니와, 나 역시 마왕퇴 한묘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관련 자료를 닥치는대로 긁어모으던 시절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책이나 논문 혹은 보고서로 봐야 소용없다. 딱 한 번 스치는 장면이라도 현장을 봐야 그 현장이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마왕퇴 한묘 3호묘

 
가서 보니 듣던 대로 마왕퇴 한묘는 퇴堆라는 말에 어울리게 높이라고 해 봐야 20~30미터 남짓할 동네 야산에서 발견됐다. 평야지대에 솟은 야산이고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아 그 전체로 보면 인공으로 봉문을 쌓아올린 거대한 황제의 능 같은 기분을 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서한西漢시대 무덤 3기가 발견된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서한의 제후국 중 하나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장사국長沙國 승상 일가족으로 밝혀졌다. 현지의 무덤 중에서 3호묘만이 무덤광을 완전히 노출한 상태로 임시 간이시설을 덮어 전시 중이었고, 그 인근 나머지 2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이미 복개한 상태였다.
 
서한시대 이들 무덤을 쓰고 난 직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야말로 내가 보지 않았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만, 무덤 문을 닫아버린 그 순간에 이곳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들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이곳이 무덤임을 표시하는 그 어떤 표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덤이 무덤임을 알려주는 표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봉분이니, 마왕퇴 한묘는 그 어느 것도 봉분을 만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따로 이곳이 무덤임을 표시하는 비석 같은 것을 세우지도 않았음이 명명백백하다.

자연이 형성한 야산 한 쪽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사람을 매장하고는 그대로 덮어 버렸으니, 이후 시간이 흘러 이곳이 무덤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글자 그대로 산릉山陵이다. 산 자체를 봉분으로 이용한 무덤인 셈이다. 이런 입지 조건 혹은 무덤 양식에서 나는 자꾸만 그해 6월, 장사 남쪽 호남성 광주에서 본 남월국 2대 군주 문제의 무덤을 떠올렸다. 무덤 양식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야산을 파고서 봉분을 따로 만들지 않고 무덤으로 이용한 맥락은 똑같았다.

더구나 장사국과 남월국은 동시에 존재한 제후국 혹은 왕국 아닌가? 나아가 두 왕국은 국경을 맞대고 툭하면 전쟁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마왕퇴 3호 한묘. 뒤편 파인 부분은 목관 같은 것을 내리기 위한 흔적이다.

 
비록 사례는 두 개밖에 되지 않지만 남월국, 그리고, 장사국이 동시에 존재하던 시절 그들의 군주 혹은 그에 버금가는 권력자가 이런 무덤에 묻혔다면, 이들과 동시에 존재한 위만조선의 무덤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증을 굳힌 순간이었다.

이런 심증은 이후 북경 답사를 이용해 실로 우연히 들른 하북성 만성한묘滿城漢墓를 보고는 심증을 넘어 사실로 확정하게 된다. 만성한묘가 위치한 산꼭대기에 올라 나는 위만의 무덤을 생각했다.

위만조선 시대 위만을 필두로 하는 그들의 지배층 무덤이 아직 단 한 곳도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체득했으니깐 말이다. (June 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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