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형한테서 동생이 살아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선호한 방식이 다르게 가기다.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형을 둔 김흠순이 딱 이랬다.
아, 이를 보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사안이 있다. 동생이 형을 어찌 생각했느냐다.
나는 앞서 누차에 걸쳐 내가 친한 영웅은 없다는 말 입이 아프도록 했으며, 그 대표가 예수였다는 말도 지겹게 했다. 내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어찌 나한테 영웅일 수 있겠는가? 볼 거 안볼 거 다 본 처지에 나랑 똑같은 그가 어찌 나를 이끄는 영웅이 되겠는가?
화랑세기 흠순공 전에 보이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했지만 공만은 홀로 그러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어리석은 형이 무에 두려운가?’”
어때? 내 말이 딱 맞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흠순은 유신을 진짜로 저리 생각했을까? 나는 달리본다.
저 말은 형에 대한 진짜 정보는 오직 나만이 독점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말해 형을 제대로 알려거든 나한테 와라!!! 이 선언에 다름 아니다.
물론 진짜로 그리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 내가 매양 집구석에서 보는 형이 어찌 남다르겠는가?
이래서 예수도 자기 고향에서는 종교질하기 힘들었다. 자기 고향에서는 그가 살아 생전에 단 한 명의 신도도 두지 못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런 그가 나중에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12세 풍월주를 지낸 보리공菩利公의 딸 보단菩丹이다. 보리는 신라 불교 사단을 말아드신 그 유명한 원광법사의 동생이다.
흠순은 18살에 차기 화랑으로 가는 요직인 전방화랑前方花郞이 되자마자, 전임 화랑들을 두루 배알하며 제가 이제 낭도들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게 되는 관행이 있었으니, 이 전례에 따라 대선배인 보리 집을 방문했다가 천상에서 강림한 듯한 아리따운 그의 여식을 보고는 넋이 빠지고 말았으니, 알아보니 방년 16세, 이름은 보단이라 했다.
이 만남과 그 직후 사건 전개를 흠순공 전에서는 이리 말한다.
“공이 보리 할아버지(인용자주-화랑세기 저자인 김대문한테 보리는 할아버지다)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이 (그의 남동생으로 당시 아홉살인)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요조窈窕함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이 곁둔으로 오랫동안 보다가 갔다. ···(인용자-텍스트 결락) 며칠 뒤에 (흠순공이) 와서 보리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사위가 되고자 한다고 했다.”
암튼 이리해서 천하절색을 부인으로 맞은 흠순은 장인한테 아주 잘 보이자, 이번에는 장인이 보단의 동생 이단利丹까지 흠순한테 보내 버리는데, 이리해서 흠순은 천하절색 시스터 부인 자매를 마누라로 거느리게 되었다.
그의 형 김유신은 독재자였으며, 모든 결정은 혼자했다. 이런 측면들이 주변 사람들한테는 무척이나 다가가기 어렵게 각인했다.
역사에 남은 그의 면모를 봐도 김유신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듯한 냉혈한이다. 이런 냉혈한한테 신뢰를 쌓으면, 그 사람은 모름지기 그를 위해 죽기 마련이다.
실제 이리 해서 김유신을 위해 충성한 무수한 부하가 주군을 위해 죽어가면서도 장군님 만세를 외쳤다.
흠순은 이런 유신과는 판이했다. 그는 다정다감했으며 무엇보다 가정은 팽개치다시피 한 형과는 왕청나게 달라 무척이나 처자식과 노는 일을 좋아했다.
또 모든 결정을 하기 전에 반드시 마누라 의견을 들었다. 내비 아줌마랑 마누라 말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언설의 제창자는 실은 김흠순이었다.
“(흠순은)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했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잘생기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 집에 들어오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중략) 유신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들러 낭주朗主(보단-인용자)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 두 낭주 및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걸인 줄 누가 알겠는가?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었지만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다.”
왜 흠순은 이러했는가? 천성이 그랬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최고의 라이벌로 간주한 형과는 다른 길을 부러라도 간 결과라고 본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렇게 동생한테 형은 난공불락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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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2) 상처가 된 낭비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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