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성한묘를 찾기는 2010년 10월 10일이다. 고고학계 인사 3명과 북경을 찾은 나는 그곳 북경 수도박물관에서 막바지에 이른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성립 60주년 성과 특별전을 관람하다가 모형으로 전시한 만성한묘滿城漢墓를 보고는 하도 독특한 데다 마침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아 현장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일행 중에 이곳을 다녀온 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쪽 지리에 밝은 것도 아니어서 일반 관광객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리는 조선족 운전사가 만성한묘를 들어봤을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지도에만 의지해 만성한묘를 찾아나섰다.
이렇게 해서 북경과 중국 남부 대도시들인 광주廣州와 주해珠海를 연결하는 경주고속도로京珠高速公路를 달려 만성한묘를 찾아 나섰다.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죽 남쪽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두 시간 이상을 달려 곡절 끝에 현장을 찾았다. 이 만성한묘는 ‘20세기 중국 100대 발굴’로 꼽혔다.
그 입구에서 보니 저 멀리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 봉우리 서너 개가 겹쳐 보이니,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그 중에서도 중간에 더 우뚝 솟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정상 바로 밑 저쪽이 ‘한묘漢墓’가 있는 곳이라 했다. 저런 곳에 능묘陵墓를 만든다? 그 의문은 일단 올라서 풀어보리라.
滿城漢墓는 그 녹록치 않은 위상 때문인지 일대는 이미 풍경구風景區로 개발된 상태다. 그 입구 주차장에 선 ‘한묘경구도유도漢墓景區導游圖’라는 유적 안내 지도와 실제 모습을 통해 주변 일대 지리와 시설 현황을 보건대, 滿城漢墓는 전면 양쪽으로 마치 봉분처럼 각각 포진한 상대적으로 작은 봉우리 뒤편으로 한 발짝 물러난 지점에 떡 하니 버티고 선 능산陵山이란 산의 주봉主峰 정상 바로 아래 지점에 위치한다.
현지 안내 책자 등에 의하면 두 고분은 남북 방향으로 약 120m 간격을 두고 일렬을 이룬다 했으니 아마도 두 능묘는 동쪽을 향해 입구인 연도羨道를 마련했으리라.
나중에 이런 추정은 관련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올라보니 능묘는 정상에서 30m가량 하강한 지점 능산 동쪽 기슭에서 발견됐다.
전면에서 바라 볼 때 두 능묘는 상대적인 위치로 보아 왼쪽이 前漢 왕실의 일원으로 중산국왕中山國王에 책봉되어 죽은 뒤에 정왕靖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유승劉勝의 묘이고, 오른쪽이 그의 처 두관竇綰의 묘다.
이들 능묘에 오르는 길은 오른쪽 계단식 등산로를 걸어가는 방법과 왼쪽 능선으로 난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는 당연히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했지만, 우리는 멍청하게도 케이블카가 있다는 사실을 땀을 뻘뻘 흘리고 정상에 올라 두 능묘를 둘러보고 난 다음에야 알고는 파안대소했다. 물론 내려올 땐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유적 주변 안내 지도를 보니, 陵山 전면 비교적 편평한 대지나 경사가 완만한 기슭에는 각종 위락시설이 들어섰으니, 예컨대 왼쪽 편 봉우리 기슭에는 아마 考古 자료 등을 토대로 했을 법한 건축물을 복원해 놓고는 이를 ‘한왕궁漢王宮’이라 선전했다.
하지만 두 능묘가 발굴된 지 오래된 까닭인지 이들 위락시설이 현대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았으며, 아마도 70~80년대 무렵에 복원한 건물이 대부분인 듯한 풍격이 있다.
유적 입구엔 우리의 사적 정도에 해당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滿城漢墓라는 안내판이 있어 읽어 보니 이곳이 이렇게 公布되기는 1988년 1월의 일이다. 漢墓로 오르는 주차장 한켠엔 적지 않은 石刻이 줄을 이루고 섰다.
이곳을 찾은 날은 마침 짙은 연무가 끼어 시야 확보가 좋지 않았다. 나중에 陵山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리고 올라 보고서야 비로소 안 사실이지만 무덤이 자리 잡은 陵山은 거대한 암벽 덩어리이며,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 가로로 뻗은 절리를 곳곳에 노출했으며, 주변 풍광과 대비할 때 높이나 규모는 서울 남산에도 모자랄 듯하지만 우뚝한 느낌을 준다.
이 산 이름이 왜 능산이며, 그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 역사는 꽤나 오래된 듯하며 陵山이란 이름이 멀리 西漢시대로 올라가, 지금은 滿城漢墓로 뭉뚱그리는 劉勝과 竇綰 부부묘와도 관련 있는지 모르겠다.
오른쪽 능선을 따라 난 등산로는 정상에 이르면 거의 수평로에 가까운 보도가 된다. 오른쪽으로 능산 정상을 끼고 왼편으로는 능산 아래를 조망한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단면 ∩ 모양으로 푹 팬 길을 따라 그 안쪽에 조금은 을씨년스러움을 풍기는 동굴을 만나니 그 입구에 ‘두관묘’(竇綰墓)라는 팻말이 보인다.
안내판 글씨는 전면에서 볼 때 墓道 입구 오른쪽에 걸었으니, 위에서 아래로 써내려갔다.
이 두관묘를 지나 120m 정도를 더 가면 마찬가지 방식의 동혈洞穴이 드러나니 이곳이 바로 두관의 남편 유승劉勝의 무덤이다.
墓道가 시작되는 입구 외부 위에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쓴 ‘정왕묘靖王墓’라는 안내 간판 글씨가 가로로 선명하다. 定王이란 劉勝이 죽은 뒤에 받은 시호다.
그는 中山國이라는 제후국을 다스린 제후였으니 그를 일컬어 흔히 ‘중산정왕中山靖王’이라 한다. 동혈洞穴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는 한창 단풍이 들기 시작한 담쟁이덩굴이 붉음을 한창 뿜어내는 중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두 고분을 잇는 등산로는 바로 두 무덤을 조성할 때 만든 길이라고 했다. 아!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등산로 사진을 찍어두는 건데 불찰이다.
능산 정상 바로 아래 이들 두 능묘가 위치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짙은 연무가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이른바 四海를 조망한다는 기분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이들 부부가 이곳에 묻힌 까닭도 지금의 내 기분과 무관치 않으리라. 더구나 劉勝은 이 일대 中山國을 다스린 군주가 아니었던가?
지금 입장료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두 곳은 각기 관람료를 징수했다. 관람료가 얼마든 내부를 개방하고, 더구나 안에 들어가서 안 사실이지만 내부에서도 사진 촬영과 같은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데다, 새로운 文物이 주는 생경함과 감동이 컸으니 北京에서 먼 길을 물어 이곳을 찾은 보람은 아주 컸다. (2016. 6. 12)
**** 이 회는 내가 《한국의 고고학》에 동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약간 손질한 것이다. 향후 만성한묘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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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위만조선과 낙랑》(4) 마왕퇴에서 생각한 위만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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