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 seven kings論》(8) 敎의 주체와 왕권의 문제

by taeshik.kim 2018. 8. 1.
반응형

<봉평비>


敎란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뜻이요 이에서 비롯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행정명령, 법원 결정문 따위 전반을 敎라고 했다. 이 경우 敎는 가르친다기 보다는 명령한다에 가깝다. 그래서 敎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 중에는 사역과 강제를 의미하는 使의 뜻이 내포하는 일이 많다. 이것이 정치 행정무대로 전용해서는 왕이 내리는 명령 전반을 敎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敎를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신라사, 특히 중고기 신라사에서는 왕권이 확립되었네 아니네 하는 문제가 빈발하고, 이를 주제로 하는 논문만 수십편 수백편에 이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근자에 발견된 501년 무렵 포항 중성리비를 필두로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따위에서는 주로 이해관계를 다투는 쟁송 문제와 관련한 신라 조정의 판결문을 담았거니와, 조정에서 이를 심판한 결정문을 敎라는 이름으로써 판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데 그 판시 주체를 보면 당시 신라왕이 아니라, 그 왕을 포함한 관료집단, 혹은 특정한 지위에 있던 어떤 신하로 표현되곤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시대 신라의 문서, 특히 법률 행정 문건을 보면 


(무슨 왕, 무슨 갈문왕, 어떤 신하들)敎....


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 이를 발견한 신라사 연구자들이 요란을 떨기를


"봐라. 신라왕은 중고기만 해도 단독으로 敎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놈들과 함께 敎를 내리니 그 지위와 권력이 신하들에 견주어 초월적이 못했다"


고 오도방정을 뜰곤 한다. 이에서 비롯되어 요즘에는 부체제설이라는 실로 요망한 이론이 등장해 지증왕 당시에는 신라에 지증왕 뿐만 아니라 그외에도 6명의 왕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더 존재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서슴지 않기에 이른다.  이렇게 육갑뜨는 무대가 작금 신라사다.  왕이 단독으로 敎를 내려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되었다는 이 밑도끝도 없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봉평비(부분)>


그렇다면 왜 이 시대 敎를 내리는 주체는 집합명사인가? 그 내용을 잘 봐라. 이런 敎가 등장하는 문건은 예외없이 쟁송 관련 문건이다. 재판 판결문 혹은 법령문이다. 이런 판결에 이르기까지에는 실무자에서 중간급 간부, 그리고 부서 장관, 그리고 그 위로 갈문왕과 왕에 이르는 '결재라인'이 있기 마련이다. 敎의 주체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결재라인에 위치하는 사람들이다. 


왕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오직 왕 혼자서 제 멋대로 해야 한다는 발상에 충실한 자들은 다른 놈들 다 제끼고 왕 혼자서 敎를 발표해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된 징표로 본다. 왕이 얼마나 등신 같았으면 지 혼자서 敎도 못내리고 신하들과 함께 내리냐는 이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신라사회는 결코 왕 단독으로 敎의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다. 결재 라인에 있는 모든 자를 敎의 주체로 표시했다. 이런 성향은 특히나 쟁송 문서에서 두드러진다. 


왜 이러했는가? 이를 묻지 않으니 저 허무맹랑한 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쟁송은 첨예한 이해 다툼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쪽은 모든 것을 얻지만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첨예한 판결을 내리 주체로 王 혼자서 등장한다는 것은 왕을 그만한 반발의 위험에 노출한다는 뜻이다. 왕 혼자서 내린 결정은 그 모든 책임이 왕 한 사람에게 귀결하기 마련이다. 


<냉수리비>


어찌하여 왕이 이런 모든 책임을 혼자서 져야 하는가? 敎의 주체가 집합명사가 되는 것은 왕에게 집중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전형의 방법이다. 반면 국가 유공자를 포상하는 따위의 일은 오로지 왕 혼자서 해야 한다. 왜? 백성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은 왕이 독점해야 왕이 빛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왕권이다. 좋은 일은 왕 혼자서 해야 하며, 나쁜 일, 피를 묻히는 일은 책임을 분산해 되도록이면 실무진으로 전가해야 한다.


왕이 모든 敎를 독점하는 일. 그것은 칼을 부르는 행위다. 

신하들더러 날 죽여주십시오 하는 호출에 다름 아니다. 


이상은 2016년 6월 3일, 김태식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몇몇 오타와 일부 대목에서는 바로잡은 데가 있지만, 골격은 같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