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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봉평비 노인奴人은 부곡部曲"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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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 앞에서>


울진 봉평비에 등장하는 노인을 부곡, 혹은 그 원류로 지적한 것은 아마 이 기사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건 내 발견이라 자부하는데, 기자가 지랄 같은 것은 본인의 발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객관화하는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은 고려시대 부곡 전공인 국민대 박종기 선생에 의해 2년 뒤에 제출되었다. 나는 지금도 봉평비에 보이는 노인奴人이 부곡이거나, 혹은 그 전신이라 확신한다. 


내가 기억하기에 박종기 선생은 문제의 발표를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는데,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하며, 그 논쟁은 시종 일관 부곡설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 발표는 나중에 한국고대사학회 기관지에 실렸다.  



<6세기대 신라의 노인(奴人)과 부곡(部曲)>

연합뉴스 | 입력 2004.03.04. 10:23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88년 발견된 경북 울진 봉평 신라비(524년 건립)에 이어 최근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6세기대 신라목간에서 "노인"(奴人)이란 말이 거푸 확인됨으로써 그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이 "노인"(奴人)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신라가 새로 정복한지역 주민들을 집단적, 강제적으로 재편한 노비나 노예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봉평비에 기초를 둔 이런 견해는 울진 지역이 원래는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과 "노인"(奴人)이라는 말을 주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奴를 노비로 본 셈이다.


이런 견해가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노인"은 6부(六部)로 대표되는 신라 중앙에 대비되어 차별적으로 만든 특수 지방 촌락이라는 다른 견해도 있다. 경북대 이문기 교수가 대표적이다.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의 경우, 울진 봉평비 발견 직후에 발표한 논문에서 명확한 견해 표명은 유보한 채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노인"이라고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면서도 "단순히 국왕에 대한 신민(臣民)의 뜻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이들 견해 중 어느 쪽이나 "노인"이 예속적이며 차별적인 성격이 있다는 데는 일치한다. 奴라는 글자가 차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奴人"을 둘러싼 지금까지 논쟁이 기이한 것은 고려시대 전공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부곡"(部曲) 논쟁의 판박이라 할 만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부곡"은 신라시대(주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군현제(郡縣制)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특수 행정 구역 중 하나로서 흔히 향(鄕)ㆍ소(所)와 나란히 거론된다.


즉, 신라와 고려는 전국을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군ㆍ현 외에도 향ㆍ소ㆍ부곡 등의 특수 행정촌을 전국적으로 두었다.


국민대 박종기 교수는 이런 시스템을 "부곡제"(部曲制)라고 규정한다.


향ㆍ소 등을 포함한 부곡제와 관련해 이들 특수촌락(또는 이 지역 주민)이 다른 일반 군현(郡縣)에 비해 신분적 차별을 받은 노예적인 천민(賤民)집단이었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이 특히 고려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치열하다.


그동안 압도적 다수는 "향ㆍ소ㆍ부곡=천민촌"이었으나 최근에는 이들도 국가에 각종 공물을 부담하는 양민(良民)이었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부곡을 둘러싼 논쟁과 6세기대 신라에서 확인되는 노인(奴人)을 둘러싼 그것이 이처럼 흡사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노인"(奴人)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확인되는 부곡(部曲) 그 자체이거나, 그 원류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봉평비의 "奴人"은 특정 개인이나 그런 사람들을 한데 묶어 지칭하는 집합명사가 아니라, 촌락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 비문에는 "거벌모라(居伐牟羅)의 남미지(南彌只)는 본디 노인(奴人)이었다. 비록 노인(奴人)이었으나..."(居伐牟羅南彌只本是奴人雖是奴人)라고 하고 있다.


문맥으로 보면 "남미지(南彌只)=노인(奴人)"이 되므로 "노인"이 사람(의 일종)임이 분명하다면 남미지(南彌只)는 분명 사람 이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비문 뒤에 가면 "남미지촌(南彌只村)"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남미지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촌락 이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봉평비에서 "노인"은 남미지라는 촌락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이지, 결코 사람이 아니며, 따라서 이 마을 성격을 규정하는 특수 용어임이 드러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려시대 부곡제 연구 전문가인 박종기 교수는 "노인이 촌락그 자체를 지칭한다면 부곡 그 자체이거나 그 원류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에서 확인되는 부곡(部曲)이란 용어는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 등의 사람을 지칭하는 중국의 사례와는 달리 예외 없이 촌락을 의미하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부곡인"(部曲人)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런 박 교수의 견해를 존중해 울진 봉평비문을 신라후기 혹은 고려시대에 익숙한 용법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거벌모라(居伐牟羅)의 남미지(南彌只)는 본디 부곡(部曲)이었다. 비록 부곡(部曲)이었으나..."(居伐牟羅南彌只本是部曲雖是部曲)"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의 노인(奴人)이 부곡이라면 그 성격 또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노인(奴人)은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이 그런 것처럼 국가에 대해부담해야 할 특정 공물(貢物) 생산 등을 담당한 특수 행정촌락이었을 것이다.

taeshik@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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