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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와 탕구(湯球) 편《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by Herodopedia taeshik.kim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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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중국사에서 저명한 혼란기로 꼽히는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이룩한 16국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양식으로 다룬 사서(史書)로써, 그 혼란기를 수습한 북위(北魏) 왕조 때의 최홍(崔鴻)이란 사람이 찬자(撰者)이다.


최홍은 동청(東淸) 하현(河縣) 사람이니 이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평원(平原) 서남쪽에 해당한다. 최광(崔光)의 종자(從子)이며, 청년 시절에 이미 수사(修史)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서진(西晉)이 망하고 그 왕실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동진(東晉) 왕조를 건국하자 중원 지역에서는 흉노족(匈奴族)의 유연(劉淵)․갈족(羯族)의 석륵(石勒)․선비족(鮮卑族)인 모용괴(慕容廆)․저족(氐族)인 부견(苻堅) 등이 각축하면서 다투어 왕조를 세우니 이를 역사에서는 16국(十六國)이라 한다. 이들 16국은 워낙 존속 기간이 짧아 그들 각각의 국사(國史)를 갖춘 왕조는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 그 체례(體例) 또한 각각이어서 통일성을 기하지 못했다. 이에 최홍은 각 기록을 참조하여 토대를 삼되 그에다가 포폄(褒貶)을 가하여 16국사를 통괄한 통사를 기획하게 되니, 이 작업은 북위 선무제(宣武帝) 경명(景明) 연간(500~503) 초에 착수해 마침내 정시(正始) 3년(506)에 완료하게 된다. 성한(成漢) 왕조를 제외하곤 각국 왕조사를 통괄하니 전체 92卷이었다. 그 작업이 최종 마무리되었을 때 《십육국춘추》는 도합 100권이었으며, 그와는 별도로 서례(序例) 1권과 연표(年表) 1권이 따로 있었다.


위수(魏收)가 《위서(魏書)》를 편찬하고, 唐 왕조가 《진서(晉書)》를 개수할 때도 최홍의 《십육국춘추》에 의지한 바가 자못 컸다. 하지만 이 《십육국춘추》는 이미 북송(北宋) 시대가 되자 대부분이 망실되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20여 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심히 어그러져 있었다.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鑒)》을 편수하면서 《십육국춘추》를 인용했으나 그가 참조한 판본은 완전본이 아니라 이 불완전본이었다.


현재, 《十六國春秋》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판본은 크게 3종류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1. 명대(明代)의 도개손(屠介孫)․항림(項琳)이 편사(編寫)한 100권본 = 이는 최홍(崔鴻)찬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실은 《진서 재기(晉書․載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鑒)》, 그리고 《예문유취(藝文類聚)》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을 필두로 하는 후대 유서(類書) 등지에 나오는 16국 시대 사실(史實)들을 가려뽑아 완성한 것이다.


2. 《한위총서(漢魏叢書)》에 보존된 16권본 = 16국마다 각각 1록(一錄)씩이 있으니 이는 명나라 때 사람이 《晉書․載記》를 근거로 해서 編寫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卷一․前趙錄 

●卷二․後趙錄 

●卷三․前燕錄 

●卷四․前秦錄 

●卷五․後秦錄 

●卷六․蜀錄 

●卷七․前涼錄 

●卷八․西涼錄 

●卷九․北涼錄 

●卷十․後涼錄 

●卷十一․後燕錄 

●卷十二․南涼錄 

●卷十三․南燕錄 

●卷十四․西秦錄 

●卷十五․北燕錄 

●卷十六․夏錄 


3. 청조(淸朝) 탕구(湯球)가 편사(編寫)한 《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 탕구는 상술한 《十六國春秋》를 저본으로 하면서도 재차 각종 유서에 인용된 일문(佚文)을 보충하여 완성하니 이것이야말로 원전 십육국춘추에 가장 가깝다 하겠다. 


중국사 전공자라든가, 한국고대사 전공자 중에서도 더러 이 십육국춘추를 인용하는 者가 있거니와, 그들의 글을 보면 마치 십육국춘추 원전이 있는냥 하지만, 실제 십육국춘추 원전은 망실된 상태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럼에도 왜 이런 인용이 이뤄지는가?


십육국춘추가 어떤 책인지도 모른 채 남이 인용한 것을 2차로 재인용하면서도 그 원전을 인용한양 치장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귀찮아서 그렇게 아무렇게 뇌까리는 경우의 두 가지 수를 상정할 수 있을지니,

반드시 십육국춘추를 인용하거들랑, 그 원전이 유래한 바의 근거를 밝혀야 할 지니리라. 


편집자 탕구는 字가 君이라, 그래서 탕군(湯君)이라는 표기로써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현(黟縣)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에서 유정섭(兪正燮)과 왕문대(汪文臺)에게 배웠으며 박송제경(博通諸經)하고 독수가법(篤守家法)했다. 은거하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장구훈고(章句訓故)에 힘썼다. 경전에 이론이 분분한 해석에는 반드시 스승의 설을 근거로 삼았으며 그 옳고 그름을 판정할 때는 천착(穿鑿)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회(傅會)하지도 않으니, 그 지방 사람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그의 고향 이산현(黟山縣)은 비록 벽소(僻小)했지만, 이곳 선비들은 모두 잠심경술(潛心經術)하면서 탕구와 어울렸다. 그는 사친이효(事親以孝)로써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 永懿 또한 늙고 병들어 눕게 되자 탕구는 人事를 끊고는 오로지 아버지 병수발에만 힘쓰니 허리띠를 풀지 않고서 수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마침내 일어나 천수를 누리고 죽자 거상 기간에 애도하는 마음이 지나쳐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성품이 耿介하여 授徒奉親, 束修外不受一無名錢. 향리에서 더욱 그의 淸操함을 공경하게 되었다. 함풍(鹹豊) 연간 초에 皖中爲賊蹂躪, 郡縣承檄練鄕兵, 當事者浼君直練局. 君自謂非禦侮材, 且鄕兵訓練無素, 不足辦賊, 死非所懼, 懼爲賊汙耳. 遂避地去. 後賊果大至, 始服君先識高蹈雲. 君頎身長髥多聞强識. 早歲覃精銳思, 治疇人學, 中西算法, 靡不洞曉. 尤善天官家言, 《開元占經》悉能成誦. 星緯推步, 硏究其奧, 而不屑以蓺事名. 亂定後, 聚書數千卷, 杜門著述, 補輯鄭氏逸書九種, 《孝經》․《論語注》搜采尤備. 並補輯劉熙《孟子注》․劉珍等《東觀漢紀》․皇甫謐《帝王世紀》․譙周《古史考》․《傅子》․伏侯《古今注》等書, 皆前人輯本所未逮. 又以《晉書》爲唐所修, 房玄齡傳稱, 好采碎事, 競爲綺豔. 劉知幾亦言, 自纂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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