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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대전永樂大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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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문연각

 

 

永樂大典考(영락대전고)

 

출전 : 이혜은, ‘永樂大典考’, 《도서관》 2002년 겨울호( 제57권 제4호. <통권 제365호>)를 요약 발췌함

 

1. 편찬과정과 구성

 

명明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는 건문제建文帝의 자리를 빼앗자 문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永樂 元年(1403) 7月1日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들에게 고금을 통한 경사자집經史子集 백가百家의 書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의醫, 복卜, 잡기雜技에 이르기까지 모두 망라하여 분류分類 편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翰林學士 해진解縉이 총재總載가 되었고 여기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147명이었다. 永樂 2年(1404) 11月에 책이 완성되자 『문헌대성文獻大成』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文獻大成』이 간략하다 생각하여 중수重修를 명하였다. 

 

永樂 3年(1405) 남경南京의 문연각文淵閣에 편찬 본부를 설치하고 요광효姚廣孝를 總載로 임명하고 解縉 등이 편찬업무를 담당하였다. 두 번째의 편찬 작업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2천169명에 달하였으며 永樂 6年(1408)에 완성하였다. 成祖는 직접 序文을 썼고 『영락대전永樂大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永樂大典』은 총 2만2천377卷에 범례凡例와 목록目錄이 60卷이며 전체 字數는 3억7천여 만 자에 1만1천95冊이다. 내용은 先秦時代부터 明代에 이르기까지의 經史子集, 석장釋藏, 도경道經, 희극戱劇, 小說, 工技, 농예農藝 및 점복占卜, 성상星相 등 각 방면의 약 7-8천 종류의 책을 망라하였다. 

 

편찬 체제는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예에 따라 음별로 단자單字를 나누어 배열하고 각 자마다 먼저 음의音義를 주석注釋하고 다시 古今의 자체字體를 비록備錄한 다음 그 글자로 이름이 붙여진 각종 자료를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있다. 여러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사용하였으므로 많은 고서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永樂大典』의 학술적 가치는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 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永樂大典』은 淸代 건륭 연간乾隆年間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에도 385種의 逸書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장정裝幀의 형태는 포배장包背裝이며 책의 크기는 50.5 x 29.8 cm로 대형이며 판식板式은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35.6 x 23.3 cm, 유계有界, 8行28字, 3葉 화어어미花紋魚尾로 표지表紙는 홍색紅色이다.  

 

南京에서 『永樂大典』을 편찬한 후 그 분량이 방대하여 刊版할 수가 없었으므로 한 부만을 초사抄寫하여 南京의 文淵閣에 두었다. 그러다가 永樂 19年(1421)에 北京에 도읍을 정하자 北京으로 옮겨 문루文樓에 비치하였다. 가정嘉靖 36年(1557) 宮內에 화재가 있었으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어 嘉靖 41年(1562)에 다시 한 부를 중초重抄하기 시작하여 융경隆慶 元年(1567)에 완성하였다. 

 

영락대전의 실제

 

그러나 그 뒤 원본은 실전失存되어 버렸고 중초본重抄本도 淸朝에 이르러 한림원翰林院에 비치되어 이미 적지 않은 부분이 유실遺失되었으나 건륭乾隆 때까지만 해도 약 9천여책이 남아있었다. 

 

광서光緖 29年(1900) 8개국 연합군이 北京에 침입하였을 때 翰林院에 화재를 일으켜 『永樂大典』에도 피해가 있었다. 그때 타고남은 일부분이 오늘날 중국, 대만, 일본,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고 그 수가 몇 백 책에 지나지 않는다.

 

2.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영락대전

 

『永樂大典』이 편찬되었던 시기의 조선은 전반적인 통치질서가 확립되어가던 시기였다. 외교적으로도 건문제建文帝, 永樂帝 때는 양국 관계도 정상화되었고 定宗 2年(1400년)에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청하였다.

 

世宗은 중국과의 무역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서적 등의 물품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사실을 말한 바 있고 中宗朝에는 서책이 보물이니 사오지 않을 수 없다는 기록도 보이는 것처럼 중국의 서적은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中宗 10年(1515)에 홍문관弘文館 副提學 김근사金謹思는 책값을 아끼지 말고 중국을 통해 서적을 널리 구할 것과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도서의 간행에 힘쓸 것을 건의함에 왕은 그대로 윤허하였다.

 

中宗은 궁중 서고 내에 최대의 장서를 갖추어 놓도록 함과 동시에 사대부가에 퍼지지 않는 책이 없기를 바랐고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광범위한 분야의 서적을 지입持入해 오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朝鮮王朝實錄』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문헌들이 많이 보이며 『永樂大典』에 관한 내용들도 발견할 수 있다. 

 

世宗은 世宗 17年(1435) 8月 형조참판刑曹參判 남지南智를 성절사聖節使로 임명하면서 “이미 찬술된 『永樂大典』은 권질卷帙이 너무 많아서 즉시 간행하지 못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간행되었는가 안 되었는가와 책 속에 갖추어진 것도 자세히 물어볼 것”을 당부하였다.

 

영락대전

 

이후 12월의 기사를 보면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명하여 유신儒臣을 모아 古今의 여러 歷史와 여러 書를 널리 채취採取해서 찬술撰述하여 글을 만들어 이를 『永樂大典』이라 이름하였으니 가령 天字이면 古今의 해석한 天字의 뜻을 모으고 地字이면 古今의 해석한 地字의 뜻을 모았으며 여러 글자의 뜻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천하 사물의 이치가 전부 대전大傳에 있다”는 내용이 보이며 “책의 卷數가 너무 많아서 어부御府에 간직하여 10間에 가득 차있어 즉시 간행하지 못했다고 한다”는 통사通事 김한金漢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사행使行을 통해 官, 사무역私貿易으로 필요한 특수 물자를 구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통해 중국의 문헌이 국내에 유입되었고 문헌 수집 활동은 사행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17세기에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기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館志』를 보면 1年에 4回의 정기적인 사행을 통해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 인원은 25-40人에 이르렀다.

 

정기적인 사행은 1400-1530年에는 정조사正朝使, 동지사冬至使, 성지사聖節使 등을 1年에 3回 보냈는데 中宗 26年(1531)부터는 여기에 천수사千秋使를 정기사절定期使節에 추가하였다.

 

이외에도 사은사謝恩使, 진하사進賀使, 진위사陳慰使, 진향사進香使, 진헌사進獻使 등 비정기적인 사절이 있었다.

 

따라서 전체 사행의 횟수에 비추어 상당한 서적이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렇게 수집된 중국 서적들의 주제도 經史類를 비롯하여, 文學, 音韻, 政典, 地圖, 地理, 醫書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것은 조선후기 까지도 계속되어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천주교와 서양문물이 도입되었고 사행인들과 중국인들과의 교류도 확대되었다. 

 

『朝鮮王朝實錄』을 살펴볼 때 永樂大典本이 조선에 들어온 명백한 기록은 없으나 『永樂大典』에 대한 논의들은 明宗 17年(1562)20), 宣祖 33年(1600)21)에도 보이며, 특히 “李珥(1533-1584)가 成均館에서 공부할 때 『永樂大典』本을 가지고 구두점을 찍은 일이 전해온다”는 正祖 15年(1791)의 기사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에도 永樂大典本의 내용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 저자는 이리 말했지만, 율곡이 본 영락대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영락대전이 아니라 영락 시대에 발행된 경전 전집류, 즉 사서대전, 오경대전과 같은 것을 말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김태식 보충)

 

 

3. 영락대전의 소장 및 보존 현황

 

현재 國立中央圖書館에는 약 24만여 책의 古書가 소장되어 있다. 이 중 中國 古書는 34,381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永樂大典』은 모두 9種이며 대부분 20세기 초에 제작된 影印本 또는 鉛活字本이었다.  

 

그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古 5-80-13

古 3-23-10

古 3-25-6

古 10-00-10

古 10-00-나35

古 6-08-154

古 0262-26 

032-락266ㅇ

519.03-소387ㅇ  

 

永樂大典 卷13991  鉛活字本(中國), 1冊.  29.8 x 17.4 cm

上海 : 古今小品書籍印行會, 1931

永樂大典 卷14628-14629  影印本,  1冊.  24.5 x 17.2 cm

永樂大典 卷2610-2611  京都帝國大學 編,  1冊. 石版本,  50.0 x 29.8 cm

永樂大典 卷19416-19426  影印本,  5冊.  30.6 x 18.6 cm, 東京 : 東洋文庫

永樂大典水經注  卷11127-11141  影印本,  8冊,  39.5 x 24.0 cm,

上海 : 商務印書館, 1935,  續古逸叢書 43

永樂大典 卷3584-3585尊  影印本,  1冊,  28.5 x 18.3 cm,  1939

永樂大典引用書目表  鉛活字本(中國),  1冊,  24.8 x 17.0 cm

永樂大典 精編  影印本,  北京 : 九洲圖書出版社, 1998  4冊,  27 cm

永樂大典 醫樂集  影印本,  서울 : 醫聖堂, 1993 1冊, 26 cm

(原本: 中國 : 人民衛生出版社, 1986) 

 

또한 한국내에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기관들도 『永樂大典』을 소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들과 같은 影印本들이었다. 결국 옛 『永樂大典』들은 한국내의 문헌들에서만 그 자취를 찾아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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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史編纂委員會. 1955-1963. 『朝鮮王朝實錄』. 서울 : 國史編纂委員會

■ 권은정. 2000.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대외적 문헌교류와 유입문헌의 인쇄 활동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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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聖七. 1960. 燕行小攷. 『歷史學報』,12: 729-807.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국역통문관지』. 서울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梁泰鎭. 1997. 實錄을 通해 본 明淸代 圖書流入論攷. 『國會圖書館報』, 34(6):6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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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存熙. 1978. 朝鮮前期의 對明 書冊貿易: 輸入面을 中心으로.『震檀學報』, 44(10):55-78.

■ 全海宗. 1970. 『韓中關係史硏究』. 서울 : 一潮閣.

■ _______. 1995. 『朝鮮朝書籍文化硏究』. 서울 : 九美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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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國家圖書館善本特藏部. 2002. 『文津流觴』, 4. 北京 : 中國國家圖書館.

■ 千惠鳳. 1991. 『韓國書誌學』. 서울 : 민음사.

■ 洪姃希. 1984. 『筆寫本 永樂大典과 四庫全書의 書誌的 硏究』.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永樂大典 : The Yongle Encyclopedia

 

明 永樂 年間에 완성한 類書로 中國 百科全書式의 文獻集으로 全書 2만2천937卷, 1만1천95冊이며 총 약 3억7천만 자. 戰火 등에 대부분이 산일되고 현재 남은 것은 800卷이 채 되지 못한다.

 

修書過程

明 太祖 洪武 21年(1388), 類書를 편찬하고자 하여 “編輯經史百家之言爲《類要》”하고자 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明 成祖 卽位 後, 爲整理知識, 下令解縉等人修書. 編撰宗旨:“凡書契以來經史子集百家之書, 至於天文․地志․陰陽․醫蔔․僧道․技藝之言, 備輯爲一書, 毋厭浩繁!”, 過程召集一百四十七人, 首次成書於永樂二年(1404年), 初名은 《文獻集成》(문헌집성)이다. 明 成祖過目後認爲“所纂尚多未備”, 不甚滿意. 永樂 3年(1405) 再命하여 姚廣孝․鄭賜․劉季篪․解縉 등에게 重修를 명하여 編寫 人員으로 朝野 上下로 도합 2천169인을 동원하여, 南京 文淵閣의 모든 藏書를 정리하여 永樂 5年(1407) 定稿하여 進呈하니, 明 成祖가 이번에는 滿意하여 親히 自序하고는 아울러 《永樂大典》이라 이름하니, 永樂 6年(1408年) 겨울에 이르러 正式 成書했다.

 

大典由解縉․太子少傅姚廣孝和禮部尚書鄭賜監修, 組織上設監修․總裁․副總裁․都總裁等職, 負責各方面工作. 監修:解縉․姚廣孝․鄭賜;總裁:副總裁:蔣用文․趙同友;都總裁:陳濟.

 

《永樂大典》修書過程對所收錄的書籍沒有做任何修改, 采用兼收並取的方式, 保持了書籍原始的內容.

 

永樂 年間에 修訂한 《永樂大典》 原書는 다만 一部만 있어 現今 存世하는 것은 모두 嘉靖 年間의 抄本이다. 嘉靖皇帝十分喜歡《永樂大典》, 經常隨身攜帶, 翻閱查找驗方. 嘉靖年間他下令抄寫了一部. 這套書到乾隆年間存有8000冊, 因此有人懷疑當時並未抄完. 對於原書的去向一直是一個不解之謎, 對於它的流向曆史學界有多種猜測. 其中被許多人所認同的一個猜測是, 原書已給嘉靖皇帝殉葬. 嘉靖駕崩後沒有馬上入葬而是等了很久, 當時抄本正在進行中, 有人認爲是在等抄寫工作結束. 而最後嘉靖的抄本只有8000冊, 讓人懷疑可能是急於下葬而沒有抄完. 如果果真如此, 目前嘉靖入葬的永陵經遙感探測已證實內部全部積水, 那麼《永樂大典》的原書已經無法再讓後人看到了.

 

現今《永樂大典》尚存約400冊, 近八百卷, 不到原書的4%. 中國北京國家圖書館珍藏近221冊, 另外, 台灣國立故宮博物院存有62冊. 美國國會圖書館還藏有41冊, 英國各地包括英國圖書館․英國牛津大學圖書館․英國倫敦大學東方語言學校․英國劍橋大學存有51冊, 德國漢堡大學圖書館․德國科隆大學圖書館․德國柏林人種博物館存有5冊, 日本國會圖書館․日本東洋文庫․日本京都大學人文科學研究所․日本京都大學附屬圖書館․日本三理圖書館․日本靜培堂文庫․日本斯道文訓․日本大阪府立圖書館․日本武田長兵衛․日本石黑傳六․日本小川廣己和韓國舊京李王職文庫亦有收集.  [1]

 

2. 賞析明成祖編纂《永樂大典》, 代表“盛世修書”的傳統, 如宋代修《太平禦覽》․《太平廣記》․《冊府元龜》․《文苑英華》, 清代乾隆時修《四庫全書》, 是爲一個時代“文治”之象徵. 《永樂大典》收錄中國明代之前的圖書文獻近八千種, 內容包括十三經․史書․子書․集部․釋藏․道經․農藝․戲劇․工技等各類典籍文章, 采掇搜羅, 浩繁淵博. 全書以《洪武正韻》爲綱, 「用韻以統字, 用字以繫事」, 按韻列單字, 先註明每一字的音義, 次錄各韻字的反切與解說, 再行記錄楷篆隸各書寫體, 彙輯與此字有關的各種資料, 乃至於抄錄整本書․整篇內容, 全文錄入, 一字不改. 書名和作者名稱, 用紅字寫出. 明世宗命人照永樂原本摹寫兩部, 正本存放文淵閣, 副本存於皇史宬. 正本於明亡之時全毀.

 

乾隆元年全祖望住李紱家中, 通過李紱借閱《大典》, 輯出王安石《周官新義》60卷․高氏《春秋義宗》150卷等. 清代修《四庫全書》, 從《永樂大典》中輯出512種書, 均見於《四庫全書總目》, 包括已失佚的李燾《續資治通鑑長編》․李心傳《建炎以來繫年要錄》․薛居正《舊五代史》․林寶《元和姓纂》․胡璦《洪範口義》․趙善湘《洪範統一》․《兩朝綱目備要》(佚名)․周巽《性情集》․錢宰《臨安集》․路振《九國志》․《東南紀聞》(佚名)等巨篇, 皆由邵晉涵自《永樂大典》輯出. 嘉慶中葉修《全唐文》, 從中輯出大量唐文, 學者徐松又輯出《宋會要》500卷․《宋中興禮書》300卷․《中興禮書續編》80卷;至清代戴震在四庫館發現《永樂大典》幾乎保存了完整的《水經注》(卷11127至卷11141), 酈道元《水經注序》原已失佚, 也由《永樂大典》保存. 其他的輯文還有《析津志》.

 

3. 年表嘉靖三十六年(1557年)四月:收藏在南京文淵閣的《永樂大典》原稿差點毀於大火. 

嘉靖四十一年(1562年):明世宗令人抄寫一本副本, 耗時六年. 

明末清初:正本下落不明, 疑毀於此時的戰火. 

雍正年間:副本收藏在翰林院. 

乾隆年間:修《四庫全書》, 發現《永樂大典》有千餘冊不知所終. 

光緒元年(1875年):不足五千冊. 

光緒二十年(1894年):翁同龢入翰林院查點, 僅存八百餘冊. 

光緒二十六年(1900年):八國聯軍侵入北京, 6月23日翰林院遭縱火, 《永樂大典》幾乎全部遭到焚毀, 所餘無幾. 翰林院內僅存六十四冊被陸潤庠運回府中. 

1912年, 中華民國政府成立, 國務院批准將翰林院所存《大典》殘本送歸教育部,  60 冊置於京師圖書館, 4 冊置於教育部圖書室展覽. 

1934年, 館藏《大典》達 93 冊. 

1951年:蘇聯列寧格勒大學將11冊《永樂大典》歸還中國. 上海商務印書館董事會將原藏商務印書館所屬東方圖書館的二十一冊捐獻出來. 顧子剛捐贈三冊, 系北洋軍閥徐世昌所有, 周叔弢․趙元方․張季薌․鄭廣權․王富晉․陳李藹如․趙玉林等先後各捐一冊. 

1954年:蘇聯國立列寧圖書館贈還原藏日本滿鐵圖書館的《永樂大典》52冊. 

1955年:德國萊比錫大學圖書館贈還中國3冊. 蘇聯科學院通過中國科學院圖書館移贈1冊. 

1959年:收集《永樂大典》原本兩百一十五冊, 加上副本․縮微膠片等, 共七百三十卷, 約占全書總卷數的3% [2] . 

1965年, 趙萬裏捐出所藏2冊《永樂大典》. 

1983年:中國國家圖書館從山東入藏1冊. 

4. 注釋《永樂大典》的曆史.北方網.

1959年3月7日, 趙萬裏《光明日報》發表《談談〈永樂大典〉》一文

5. 參考《永樂大典》的悲歡離合

《四庫》底本《永樂大典》遭焚探秘 

永樂大典專題 

分類: 類書, 明朝, 世界之最, 中文古典典籍

其他語言: da de el en es it ja no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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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樂大典" on the wikipedia website

 

 

Qingjing Jing from the Daoist Information Site

Qingjing Jing partly translated

TAISHANG LAOJUN SHUO CHANG QINGJING MIAOJING, Daozang 620 edition

Retrieved from "http://en.wikipedia.org/wiki/Qingjing_Jing"

 

 

The Yongle Encyclopedia (traditional Chinese: 永樂大典; simplified Chinese: 永乐大典; pinyin: Yǒnglè Dàdiǎn; literally “The Great Canon or Vast Documents of the Yongle Era”) was a Chinese compilation commissioned by the Chinese Ming Dynasty emperor Yongle in 1403. It was then the world's largest known general encyclopedia, and one of the earliest.

 

Development of the work

Two thousand scholars worked on the project under the direction of the Yongle Emperor (reigned 1402–1424), incorporating eight thousand texts from ancient times up to the early Ming Dynasty. They covered an array of subjects, including agriculture, art, astronomy, drama, geology, history, literature, medicine, natural sciences, religion, and technology, as well as descriptions of unusual natural events. The Encyclopedia, which was completed in 1407 or 1408[1] at Nanjing Guozijian (南京國子監; the ancient Nanjing University - Nanjing Imperial Central College), comprised 22,877 or 22,937[1] manuscript rolls, or chapters in 11,095 volumes occupying roughly 40 cubic metres (1400 ft³) and using 50 million Chinese characters.[2] It was designed to include all that had ever been written on the Confucian canon, history, philosophy, and the arts and sciences. It was a massive collation of excerpts and works from the mass of Chinese literature and knowledge.

 

 

Transcription and disappearance

Because of the vastness of the work, it could not be block-printed, and it is thought that only one other manuscript copy was made. In 1557,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Emperor Jiajing, the Encyclopedia was narrowly saved from being destroyed by a fire which burnt down three palaces in the Forbidden City. Afterwards, Emperor Jiajing ordered the transcription of another copy of the Encyclopedia.

 

Fewer than 400 volumes of the three manuscript copies of the set survived into modern times. The original copy has disappeared from the historical record. The second copy was gradually dissipated and lost from the late-18th century onwards, until the roughly 800 volumes remaining were burnt in a fire started by Chinese forces attacking the neighboring British legation, or looted/rescued - depending on one's point of view - by the Eight-Nation Alliance forces during the Boxer Rebellion in 1900. The surviving volumes are in libraries and private collections around the world.

 

What happened to the original is not known. There are four hypotheses:

 

It was destroyed in the 1449 fire in Nanjing.

It was burnt in the Palace of Heavenly Purity (in the Forbidden City) during the reign of Qing Dynasty emperor Jiaqing.

It was destroyed with Wenyuange (the Imperial library in the Forbidden City) at the end of the Ming Dynasty.

It was hidden.

Some think that the Encyclopedia disappeared at the death of Jiajing, having been taken by the emperor to his grave, and it will yet be found hidden in the tomb complex of Yongling.

A 100-volume portion was published in Chinese in 1962.

 

 

See also

Four Great Books of Song

Gujin Tushu Jicheng

Siku Quanshu

Chinese encyclopedias

 

Notes

^ a b "Yongle dadian". Encyclopædia Britannica.

^ Ebrey (2006), 272.

 

References

Ebrey, Patricia Buckley, Anne Walthall, James B. Palais. (2006).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ISBN 0-618-13384-4.

 

External links

Destruction of Chinese Books in the Peking Siege of 1900. IFLANET.

In Search of the Yongle Encyclopedia. china.org.cn.

China to Digitalize World's Earliest Encyclopedia. People's Daily Online.

Biggest and Earliest Encyclopedia. chinaculture.org.

Experts Urge Collectors To Share World's Earliest Encyclopedia. china.org.cn.

Retrieved from "http://en.wikipedia.org/wiki/Yongle_Encyclopedia"

 

 

永楽大典

일본어로는 에이라쿠타이텐(えいらくたいてん)이라 읽는다. 中国 明代에 編纂된 中国 最大級 類書를 지칭한다. 2만2천877권, 1만1천95冊이며 목록만 60권이며, 1408년(永楽 6)에 成立되었다.

 

最初는 1404年 성립되었으며 ‘文献大成’이라는 書名을 永楽帝로부터 하사받았다. 하지만 不備한 점이 발견되어 다시 편찬한 뒤 卷頭에 永楽帝 御製의 序를 冠하여 改하여 ‘永楽大典’이라는 書名을 賜받았다.

 

内容的으로는 経․史․子․集의 四部에서 天文․地誌․陰陽․医卜․僧道․技芸에 미치는 모든 図書를 原本에 의해 蒐集하고 『洪武正韻』이라는 韻書의 韻 順序로 分類 排列함으로써 検索의 편리를 기했다. 다만 단기간에 완성한 까닭에 조잡함도 발견된다.

 

개중에는 後世에 散佚하고 만 문헌도 포함된다. 現行 『旧五代史』나 『宋会要輯稿』, 『経世大典站赤門』 등은 清代가 되어 이 영락대전에서 蒐集해 再生한 것이다. 이와 같은 書籍이 経部 66種, 史部 41種, 子部 103種, 集部 175種으로 合計 4천926권에 이른다고 한다.

 

1562년(嘉靖 41)에 原本 외에 正副 二本이 제작이 시도되어 隆慶 년간(1567~ 1572) 초에 完成했다. 原本은 南京, 正本은 文淵閣, 副本은 北京의 皇城内에 안치되었다. 後世, 火災나 盗難을 만나 正本은 明末 動乱에 焼失되었다. 副本은 清朝에 継承되어 1772년(乾隆 38)에 翰林院에 収蔵되고, 乾隆帝의 命에 의한 「四庫全書」 編纂에 活用되었으나 애로우호(アロー号) 사건이나 의화단의 난(義和団の乱) 등에 의해 대부분이 亡佚되고 말며 現在까지 전해진 것은 60冊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현재 北京図書館 所蔵). 다만 世界 各地에 散在하는 零本을 모으면 수백 책 단위가 된다고 하며 그것을 集成한 影印版도 中華書局에서 出版되었지만 그래도 永楽大典 全体에서 보면, 몇 %에 지나지 않는 分量이다. 日本에도 静嘉堂文庫나 東洋文庫 등지에 零本이 所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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