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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승달(王僧達. 423~458)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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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朝 宋의 大臣으로 지금의 山東에 속하는 낭야(琅邪)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대대로 大族이며, 臨川王 劉義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詩文을 잘 지어 당시에 자못 文名이 높았다. 나중에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의 후군참군(後軍參軍)이 되었으며 의성태수(宣城太守)를 역임했다. 성격이 유렵(遊獵)을 좋아해 말을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3~5일 동안 귀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사냥하는 곳에서 사송(辭訟) 문서를 다루는 일도 있었다. 그때 太子 유구(劉劬)가 작란(作亂)하자 심양(尋陽)으로 도망쳤다. 뒤에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에 가작되었다. 왕승달은 사람됨이 자만심이 심해 재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군태수(吳郡太守)에 제수되어 외관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태상경(太常卿)이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上表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심히 불손하여 면관(免官)되었다. 대명(大明) 원년(457),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옮겼으며 領太子中庶子하고, 영릉현후(寧陵縣侯)에 봉해졌다. 대명 2년,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겼다. 사람됨이 광오불기(狂傲不羈)하여 누차 범오(犯忤)를 저지르다가 마침내 고관(高闍)에게 모반죄를 쓰고는 옥중에서 사약을 받고는 죽으니 불과 36세였다. 


그의 사적은 沈約이 찬한 宋書 중 列傳 第三十五에 ‘王僧達 顔竣’에 입전되었다. 이에 의하면 왕승달은 태보(太保)를 역임한 왕홍(王弘)의 작은 아들이며, 형은 왕석(王錫)이다. 말을 더듬은 데다 풍채(風采)가 못났다. 하지만 太祖가 그의 총민함을 듣고는 덕양전(德陽殿)으로 불러 인견하고는 그의 書學과 家事를 물으니 응대가 한민(閒敏)한지라 上이 심히 그것을 잘 알고는 臨川王 劉義慶의 딸을 출가케 했다.


어려서 好學하고 屬文을 잘 했으며 나이 20이 되지 못해 始興王 浚의 後軍參軍가 되었고, 太子舍人으로 遷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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