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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서예가 이완용] (11) 윤치호와 이완용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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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평상심은 도道였는가 11>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이완용의 글씨를 보고 그 소감과 비평을 한다는 것이, 어느새 근대 한국 서예사 이야기로까지 넘어갔다.

일단은 여기서 그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점은 이야기하련다.

이완용이 매국賣國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한국 근대미술사의 등장인물로는 여겨야 그 안의 많은 의문점이 해결되고 또 풍성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의 일기에 나오는 서화미술원 언급만으로도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약간 다른 걸 논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그런 작업을 이완용이 죽일 놈(이미 죽었지만)이라고 해서 미뤄두어야 할까.

역시나 친일파였던 윤치호(1865~1945)가 남긴 <윤치호 일기>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필수 텍스트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그가 근현대사의 현장 곳곳에 얼굴을 비추던 사회 저명인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일기 안에는 1890~1940년대 한국 사회와 정재계, 언론계, 문화계의 이면사가 고스란히 들어있고, 사료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연구자가 사금 채취하듯 사실史實을 걸러서 골라내야 하지만, 그건 다른 사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경>을 보면 "채봉채비 무이하체采葑彩菲 無以下體"란 구절이 나온다.

무를 캘 때 그 뿌리가 나쁘다고 그 잎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말려서 시래기로 만들면 얼마든지 훌륭한 반찬거리 국거리가 되지 않던가?

또 그것이 일종의 반면교사도 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첨부사진: 이완용 일기(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중 모리 카이난(1863~1911) 추도회 부분.

모리는 일본 궁내대신 비서관이었는데 1909년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수행해 하얼빈에 왔다가 안중근(1879-1910) 의사 총에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2년 뒤 죽었다.

그는 특히 한시 창작에 일가견이 있는 문인으로, 이토가 통감으로 서울에 왔을 때 따라 와서 한국 문인들과 자주 시를 주고받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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