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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기념품이 된 피양 명물] (2) 평양방송국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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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석지훈 선생님이 댓글로 JBBK의  답을 달으셔서,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시는 게 나으리라.

바닥면에 새긴 아홉 글자, "평양방송국 개국기념"이다.

이 땅에 방송이란 게 처음 등장한 것은 1927년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도 시험삼아 전파를 송출하긴 했었지만 엄연한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방송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땐 TV는 없었다(생각보다 알려지기는 일찍 알려진다. "텔레비-죤으로 파송하여 왔습니다"같은 문구가 1930년대 잡지에 보인다).

라디오 전파를 정동 1번지 산마루(지금 덕수초등학교 터)에 세운 방송국에서 쏘아보냈는데, 그 전파 호출부호가 JODK였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시작하는 방송국이라 D를 붙였다나.

그래서 방송을 시작할 때 "즈에이-오우-듸-케에이. 여기는 경성방송국이올시다."라고 했다고 한다(지금도 라디오를 틀때 kbs 제1라디오에서 간혹 나오는 멘트 "에이치엘 어쩌구"가 호출부호다).

라디오라는 것은 물론 비쌌다.

또 라디오로 방송을 듣는 값도 비쌌다.

하지만 비싼 값을 주고라도 들여놓고 싶을 만큼 사람들을 매혹시켰다(수신료의 가치?).

1933년 조선에 3천 대 남짓이던 라디오가 3년만에 7배 이상 늘어났다니 그 인기를 알 법하다.

그러니 조선 각지에 방송국이 슬슬 여럿 들어서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대도시 위주로 세워지니만큼, 관서의 대도회 평양에도 1936년 방송국이 세워진다.

그 기념으로 만든 벼루라면, 연대가 분명해지는 셈이니 이 벼루의 가치가 더해진다.

아무한테나 주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적어도 지역 유지급한테 증정했을 텐데, 받은 이가 받고 바로 일본으로 갖고 갔던지 아니면 해방이 되어 쫓겨갈 때 짐꾸러미 속에 넣어 갔던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먹 가는 면이 좁아서 실용적이진 않으므로, 그저 고이 보관만 했는지 참 깨끗도 하다.

일제의 평양방송국은 1945년 해방과 함께 명을 다한다.

그 제반설비를 이어받아 새롭게 개국한 게 바로 오늘날 이북의 조선중앙방송이다.

그쪽에서 자기네 전 역사를 수집 정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일제 때 평양방송을 들어본 이가 얼마나 살아계신지, 이런 대동강석 벼루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요즘은 일본에 있던 게 역수입되는 사례가 있어, 대동강석 벼루가 그렇게까지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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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이 된 피양 명물](1) 대동강 벼루 JB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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