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아마도 부산 국립해양박물관 김윤아 아니었나 하는데, 이 죽천행록을 애타게 찾는 전갈이 있었다.
이 책이 분명 나한테는 있었지만, 내 서재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 있다면, 내가 소장한 내 책을 왜 찾을 수 없는지 금방 알리라.
저 책이 있다 하셨는데, 꼭 빌려 달라는 읍소였다.
하지만 나는 찾지 못했다. 서재를 뒤진다 했지만, 이럴 때마다 필요한 책은 안 보이는 그 신이한 법칙이 그때도 작동했다.
저 책이 저자 조규익 선생한테도 없었고 출판사 박이정에도 남아 있지 않다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제 서재를 뒤지는데 뿔싸 저 책이 보인다.
저 책, 아니 더욱 정확히는 저 책이 다루는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이라는 사람을 비롯한 조선 사신단 행적을 기록한 한글 기행문인 죽천행록竹泉行錄은 2001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저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이라 할 때 그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
내가 이를 중시하면서 유별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런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린 주인공이 나이며, 당시로서는 한글 연행록으로서는 가장 이르고, 무엇보다 당시 바닷길을 이용한 사행길이 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저에는 험난한 바닷길을 마주하며 그것을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 움직임이 포착되거니와 당시 해양신앙 양태를 저처럼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 드물다.
저를 세상에 알린 이는 숭실대 국문학과 조규익 선생이었다.
당시 그 중대성에서 나는 그와 관련한 세 건 기사로써 이 자료를 소개했으니, 하도 오래전 기사라 검색도 되지 아니해서 그 옛날 기사로 갈무리해 둔 것을 전재한다.
기사번호 AKR20010507003800005 작성 김태식 / 2001.05.07 20:10:01 수정/송고 윤동석 / 2001.05.07 20:15:41 배부일시2001.05.07 20:15:41
한글 연행록 '죽천행록'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1624-1625년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된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을 비롯한 조선 사신단 행적을 기록한 기행문인 죽천행록竹泉行錄 한글본이 발견됐다.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가 한 고문서 수집가에게서 입수해 7일 공개한 이 자료는 한글 본문 130쪽에 한문으로 된 발문 11쪽을 덧붙이고 있으며 조선 사신단이 추운 겨울날 길바닥에 엎드려 출근하는 중국관리들에게 글을 올리는 모습을 비롯해 명-청 교체기 절박한 조선측 사정을 여과없이 전달하고 있다.
죽천행록과 같은 사건을 담고 있는 다른 기행문은 여러 종이 보고돼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흔치 않은 한글 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한.중 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박현규 교수는 지적했다.
이 죽천행록이 연행록燕行錄으로서는 담헌 홍대용의 을묘연행록보다 120년 가량 앞선 최초의 한글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 분야 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임기중 교수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연행록의 경우 처음에는 한문으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아녀자 등을 위해 한글 번역본이 나오곤 했다"면서 "따라서 죽천행록의 한글본이 곧 인조 때 나온 그것이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taeshik@yonhapnews.net
(끝)
기사번호 AKR20011228001800005 작성 김태식 / 2001.12.28 13:00:32 수정/송고 홍혜자 / 2001.12.28 15:21:02 배부일시2001.12.28 15:21:02
이덕형 중국 사신 여행기 죽천행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최근 죽천행록竹泉行錄이라는 한글 필사본 조천록朝天錄을 발굴해 공개한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조규익(44) 교수가 이에 대한 해제와 연구 및 자료 소개를 겸한 단행본 죽천행록(박이정)을 냈다.
이번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죽천행록에 대한 해제이고 2부는 이를 현대어로 완역했으며 3부에는 같은 내용, 같은 사건을 한문으로 기록한 조천록(일명 '항해록') 완역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4부에는 죽천행록과 조천록을 각각 영인해 싣고 있다.
책 이름이기도 한 '조천록'은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신이 그 과정을 남긴 기록을 말하는데 청나라에 사신을 다녀온 기행문 연행록燕行錄과 대비된다.
죽천행록은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정을 담고 있다. 사신단은 인조 2년(1624년) 7월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10월 귀국했다.
사신단 파견 목적은 이른바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에 대해 명나라 황실이 정식 조선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사정을 기록한 여행기는 죽천행록 말고도 여러 종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죽천행록은 한글로 쓰여 있고 다른 조천록이나 연행록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이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더구나 조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기행기가 대체로 한문으로 먼저 쓰이고 후대에 한글로 번역된데 비해 이것은 애초에 한글로 제작됐다는 점이 아주 독특하다.
주의할 것은 이 죽천행록을 쓴 사람은 이덕형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이끈 사신단 일원 중 누군가일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여행기 안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임하 허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 교수는 '임하 허생'이 미수眉首 허목許穆(1595-1682)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한국 한문학계 일대 '사건'이 되겠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를 조 교수 자신도 제시하고 못하고 있다.
조 교수 주장처럼 이 조천록이 현존 조천록(연행록 포함) 중 가장 오래된 한글본일 가능성은 크다.
이 자료를 소개한 조 교수가 국문학 전공이기 때문인 듯 이 여행기의 가치를 문학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고 있으나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연구성과는 오히려 역사학계에서 기대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존 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 사신단의 비참한 처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누루하치가 이끄는 만주족 후금後金이 요동지방을 장악한 직후 이를 둘러싼 조선과 명나라 조정 분위기가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다.
또 하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 지배층에 팽배하게 되는 이른바 소중화주의 형성 과정을 둘러싼 새로운 의문점을 죽천행록은 던지고 있다.
즉, 이에 따르면 조선 사신단은 책봉 교서를 받기 위해 명 관리들에게 뇌물을 쏟아야 했고 59세 늙은 이덕형이 섬돌 아래에서 명 관리들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책봉 교서를 애걸하는 등 갖은 굴욕을 당했다.
따라서 조선은 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선 뒤에도 소중화주의에 매달리면서 사라진 명明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학계가 해야 한다.
조 교수는 조천행록이 한글로 된 데 대해 "부녀자 등에게 널리 읽히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런 설명은 '한글=민중의식'이라는 뿌리없는 등식에 사로잡힌 선입견일 뿐 오히려 정반대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죽천행록 저자가 제대로 된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고, 중국에 대한 불만을 곳곳에서 표출하는 기행록을 중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한글로 일부러 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596쪽. 2만3천원
taeshik@yna.co.kr
(끝)
기사번호 AKR20020103002200005 작성 김태식 / 2002.01.03 16:23:51 수정/송고 심규선 / 2002.01.04 07:37:05 배부일시2002.01.04 07:37:05
기사번호 AKR20020103002200005 작성 김태식 / 2002.01.03 16:23:51 수정/송고 심규선 / 2002.01.04 07:37:05 배부일시2002.01.04 07:37:05 작성부서 문화부 DESK부서 문화부 내용 학술 지역 속성 키워드 엠바고1차 : 2002.01.04 07:37:05
<조천록(朝天錄)에 나타난 조선시대 바다신앙>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전소설 「심청전」은 문학연구자뿐만 아니라 민속학 전공자에게도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현존 어느 우리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바다에 대한 인신공희人身供犧(human sacrifice) 신앙이 유일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청전」에 나타난 바다신앙은 유교적 충효 윤리로 각색된 흔적이 농후하다.
봉사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의 제물이 됐으나 이에 감동한 용왕이 기특히 여겨 왕후까지 된다는 내용은 분명 조선시대 지배층의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결과이지 '민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최근 숭실대 조규익 교수가 발굴 공개한 17세기 한글 기행문인 죽천행록竹泉行錄 및 이것과 같은 내용,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 몇 종의 다른 기행문은 외래종교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조선시대 바다신앙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학적 가치 또한 심대한 자료로 평가된다.
죽천행록과 그 한문본 자매편인 조천록 등은 죽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을 우두머리로 해 파견된 조선사신단이 인조 2년(1624년) 7월 서울을 출발해 이듬해 10월 귀국하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중 죽천행록의 경우 서울을 떠나 중국에 도착하는 과정은 결실된 반면 중국 조정에서 소임을 마치고 서해 바닷길을 통해 귀국하는 과정만 한글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조선 당대 유학자들은 겉으로는 무당과 무속을 배격했음에도 바다를 통해 중국을 오갈 때 무당을 대동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제 아무리 유교적 합리주의에 투철한 유학자도 걸핏하면 폭풍이 일고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서 무당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기행문 1625년 3월 19일자를 보면 귀국선에 오르기 전 이덕형이 선소船所라는 곳에 나아가 바람귀신과 천비 낭랑天妃 娘娘, 용왕 및 소성小聖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관찰된다. 선소는 일종의 뱃사람 사당인 것 같다.
또 이튿날에는 배에 오르기에 앞서 발선고사發船告祀를 올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출항 며칠 만에 폭풍이 일어 더 이상 전진을 못하자 3월 23일에는 천비天妃 와룡왕臥龍王과 소성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
오고 갈 때 사정이 모두 기록된 한문본 조천록을 보면 바다신앙에 대한 행태가 더욱 생생하다.
사신단이 중국으로 출항하기 직전인 7월 4일자를 보면 바닷길을 떠나기에 앞서 산해山海 신령들께 각종 희생물을 올려 제사를 드려 안전 운항을 기원하고 있으며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점쟁이를 시켜 무사귀환 여부를 점치고 있다.
출항 날짜도 점쟁이가 골랐으며 출항에 앞서 또 바닷가 산꼭대기에서 제사 터를 만들고 장막을 친 다음에 해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 의식에는 독특한 데가 있다. 예컨대 중국을 향해 항해하던 중 거센 바람이 일어 침몰 일보 직전에 몰리자 사신단은 고기와 같은 희생과 술을 갖추어 바다에 제사를 드린 다음 제문을 제물과 함께 바다에 던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또 제문을 쓴 붓을 폐백에 싸서 바다에 던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제사를 받는 여러 바다신에도 등급이 있었음이 다음 기록으로 확인된다.
"대저 바다에 제사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천비 낭랑의 신이며 다음은 용왕지신이고 그 다음이 소성지신이다"
이에 대해 기행문은 천비는 옥황상제의 따님으로 사독四瀆을 관장하며 용왕은 이를 보좌하고, 소성은 용왕의 사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덕형을 비롯한 사신단 주요 인사들이 아무리 철두철미한 유학자임에도 바다라는 대자연 앞에서 발가벗은 모습은 유학 이전 이른바 '원시신앙' 신도일 뿐이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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