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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왕과 국가를 보위해? 안중에도 없던 조선 양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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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

 
딴 거 없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관련 실기류를 읽어봐도 금방 안다. 

임란 일기류를 흔히 용사일기龍蛇日記라 하거니와, 쇄미록鎖尾錄 역시 개중 하나라, 저자는 오희문吳希文(1539~1613).

비단 쇄미록만이 아니라 읽으면서 이상한 점은 이들은 국가나 왕의 안전에는 그 어떤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일신보신. 나랑 내 가족 안위만 걱정일 뿐이다. 

물론 임란 발발 당시 오희문만 해도 이미 나이 오십이 넘어 노인네 취급되었지만,

그 아들들은 관직에 진출한 상태라 동분서주 군사 모으고 군량대느라 여념이 없지만, 오희문 정신 세계는 전연 딴판이라 오로지 제 일신과 가족 걱정 뿐이다.

그는 전직 고위관리도 아니었기에 그 어떤 국가와 왕에 대한 의무도 없었다.

그런 그를 이상하다 여긴 사람도 없었다.  

난리통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도 조선시대 양반들 정신 상태는 오희민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희한한 점은 그 국가와 왕의 안위는 오직 관직에 진출해 있거나 전직 관료들만 관심 사항이었다는 사실인데,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경우 병자호란 때인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으로 은거한 상태였음에도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계속 탄핵받는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도 내가 현직 관리가 아니면, 내가 전직 관리가 아니면 나랑 아무 관계도 없던 사회가 조선이다.

물론 백성들이야 총알받이로 징발되었지만, 그 총알받이도 백성들 뿐, 양반가 사대부가에 속한 노비들은 개인 재산이라 해서 징발되지도 않았다. 

애꿎은 일반 백성, 중들만 총알받이로 나갔을 뿐이다. 

동시대 유럽이나 일본 중국과 비교해도 참말로 특수한 상황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간 것 보면 신통방통할 뿐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런 관념 자체가 조선시대 양반은 없었다.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등장이야말로 한국사회가 근대 국민국가로 가는 첫 번째 징조다.

그 징조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에 처음 열렸다. 

국가적 누란에 구호기금이라는 개념이 식민지시대에 처음으로 생겼다.

을축년대홍수는 그 본격 출발을 알린 본격 신호탄이었다. 

태평양전쟁기에는 군사물자를 기부한 일, 이를 심상히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새롭게 등장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비록 강요된 측면이 많기는 하지만, 평화의댐 건설과 독립기념관 건설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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