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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이덕무 행장에서 유념할 대목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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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메모한 청장관 이덕무, 박지원이 정리한 그의 행적
 

앞서 연암 박지원이 쓴 형암炯菴 행장行狀, 곧 이덕무가 죽고 나서 절친 연암이 쓴 행적을 소개했거니와,

연암집에 수록된 이 행장은 분량이 길어 제대로 읽고 소화할 독자가 몇이나 될까 몹시도 의뭉스럽기도 하거니와 

저에서 나름 우리가 착목해야 하는 대목 몇 가지를 추려 강조하고자 한다. 

 

배접. 이런 배접을 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고서들이 사라져갔다.

 
먼저 어린 시절 이덕무와 관련한 일화로


한 번은 집안 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라는 증언이 있거니와 이는 고서가 어떻게 소멸해 갔는지를 엿보이는 대목이라,

창호지 벽지로 쓴다 해서 고서 혹은 고문서가 사라져갔다.

그렇게 바른 벽지 창호지에서 아주 가끔 놀랄 만한 발견이 이뤄지기도 한다. 

저 옛 책은 배접지라 해서 새로운 종이를 뒷받침하는 뒷배로 쓰기도 하는데, 이에서도 더러 사라진 중요 문서가 발견되기도 한다. 


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이는 전통시대 글이 유통하는 경로를 엿보이는 사례인데,

요즘 같은 인쇄매체 혹은 sns시대와는 달리 저때는 내가 자랑할 만한 내 글은 저런 식으로 일일이 부본을 카피해서 돌렸다.

요즘 행태로 보건대 논문 별쇄본 돌리기랑 비슷하다.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전통시대 전형하는 서적 유통 경로다.

결국 직접 붓으로 베끼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훗날 필요하다 생각하는 대목들을 베끼는 것이다.

이렇게 베낀 것만 따로 출판하는 일도 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책벌레 이덕무 일화인 셈인데, 소매 속에 넣어다니는 책이 크면 힘들다.

부피도 있고 무엇보다 휴대에 불편하다.

저런 책을 요즘은 포켓판이라 하는데, 저 시대는 수진본袖珍本이라 해서 깨알 같은 텍스트로 무장한 작은 책자를 도포자루에 들고 다녔다. 


만약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


이것이 바로 차기箚記라는 것으로 메모다.

저 메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내가 주구장창 말했다.

저 메모가 쌓여 결국 훗날 훌륭한 논문이 되고 기고문이 되며 단행본이 된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이는 정조시대 유명한 규장각 설치 이야기라, 이에 대해서는 하도 논급이 많지만, 그에 보탤 증언이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이게 어떤 병증을 말하는지는 이쪽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봤으면 싶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功懋와 아들 광규光葵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문집이 간행되는 경로 중 하나의 새로운 사례라 할 만하다.

임금이 지시해서 그리했다.

그 발간비는 임금이 쓰는 예산 내탕고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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