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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택리지, 죽임이 일상화한 당장 시대가 갈구한 유토피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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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언설이 이른바 당파성론이다. 

흔히 말하기를 식민권력에 복무한 일본 관학 역사학이 이런 논리를 구조화했다 하며,

그것을 정체성론 타율성론과 더불어 식민사학을 규정하는 삼대 악의 축으로 대서특필한다. 

맞는가?

당파 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인식은 저들이 새삼스럽게 개발한 것도 아니요,

무엇보다 조선시대 당쟁을 몸소 겪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이런 인식은 구한말 그리고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계열 역사학이나 다른 계열 역사학 문화사에서 광범위했으니,

조선이 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병폐 중 하나가 저 당파성론이 당당히 올라 있다. 

함에도 왜 이런 사실은 도외시한 채 모든 책임을 일제에 덮어씌우는가?

편하기 때문이다. 전가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가 면피가 되는 까닭이지 우수마발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일제는 언제나 요술방망이다. 

그 유명한 조선시대 지리지 논술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가 있다.

흔히 말하기로 이중환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지리서? 라 하지만

인문지리서는 무슨? 어디가 살기 좋은 땅이며, 어디가 죽어 좋은 땅인가를 논한 풍수지리책이다. 

한데 이 논설을 이중환은 도대체 왜 썼을까?

앞서 말한 당파성론 이야기로 잠시 다시 돌아가 물론 소위 일제 식민관학자들이 당파성론을 집중 부각한 것은 부인할 수 없기는 하지만

이 당쟁망국론이 과연 그들만의 전매특허였던가 하는 점을 이 택리지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짚어야 한다.

이중환은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13년 숙종 30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兵科에 급제했다가 영조 즉위 직후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1726년 절도絶島로 귀향갔다.

계속되는 유배생활과 이후 방랑 생활에서 풍수지리학에 심취한 결과물이 택리지擇里志다.

치열한 당쟁 와중을 살다가 간 그는 이 택리지 총론總論에서 당쟁을 다음과 같이 맹비난한다.


나라의 제도가 비록 사대부를 우대하였으나 죽이는 것을 또한 가볍게 했다.

그러므로 어질지 못한 자가 제때를 만나면 문득 나라의 형법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도 하면서 사화士禍가 여러 번 일어났다.

명망이 없으면 버림을 당하고, 명망이 있으면 꺼림을 받으며, 꺼리면 반드시 죽인 다음에 그만두니, 참으로 벼슬하기 어려운 나라다.


그리고 사대부 기강이 점차 쇠해지면서 옳다 그러다는 다툼이 커지고, 다툼이 커짐에 따라 원수가 깊어졌다.

원수가 깊어지니 서로 죽이기에 이르렀다. 


아아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山林뿐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그렇지도 못하다.

무신년에 여러 역적이 사대부 신분으로 시골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그들을 잡아 죽인 다음에도 조정에서 항상 산림 으슥한 곳에서 큰 도적이 슬그머니 나오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리고 도적이 되지 않을 것을 안 다음에는 또 그 마음씨를 의심하여 괴벽하다고 지목한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고자 하면 칼·톱·솥·가마 따위로 정적을 서로 죽이려는 당쟁이 시끄럽게 그치지 않고 초야에 물러나 살고자 하면 만첩 푸른 산과 천겹 푸른 물이 없지는 않건만 쉽게 가지도 못한다.


이렇게 당시 세태를 한탄하면서 이중환은 택리지를 쓴 목적으로 


이렇다면 사대부도 없고 농·공·상도 없으며 또 살 만한 곳도 없을 것이니 이것을 땅이 아닌 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기록한 것이다.


고 한다.

요컨대 택리지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상화한 극한 당쟁의 시대에,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나선 궁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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