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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반드시 메모한 청장관 이덕무, 박지원이 정리한 그의 행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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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과 열하일기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형암炯菴 행장行狀

우리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시호諡號 소이공昭夷公은 휘가 선생善生이다.

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휘 정형廷衡은 감찰로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휘 상함尙馠을 낳았다.

상함공이 휘 필익必益을 낳으니 강계 부사江界府使요, 부사공이 휘 성호聖浩를 낳으니 이 분이 형암의 선친이다.

모친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토산 현감兎山縣監 휘 사렴師濂의 따님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휘 필성弼成의 손녀이다.

형암은 휘가 덕무德懋요 자는 무관懋官이니, 형암은 그의 호다.

영종英宗 신유년(1741, 영조 17)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 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한 번은 집안 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앉거나 눕거나 거동하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있어 한자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종일토록 여럿이 있을 적에도 정중하되 뻐기지 않고, 잘 어울리되 허물없이 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옛 사람의 취지를 구하되 답습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다 정리情理에 핍근逼近하고 진경眞境을 묘사하여, 편마다 그 묘미가 곡진해서 읽어 볼 만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교유도 함부로 하지 않아서, 현달한 벼슬아치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약관이 넘도록 명성이 마을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만약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는 고거攷據와 변증辨證을 잘하였다.

일찍이 동식물과 명물도수名物度數, 나라를 경영하는 방략과 금석비판金石碑板으로부터 우리 왕조의 법제와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시에 뛰어나, 당세에 과시科詩로써 이름난 자들도 스스로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간간이 과거를 본 적도 있었으나 즐겁게 여기진 않았으며, 마침내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을유년(1765, 영조 4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비록 종자宗子의 집이라도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며,

“눈빛이 번쩍번쩍하니 이야말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기해년(1779)에 외각外閣[교서관校書館]의 검서관檢書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성상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르다〔登瀛州〕’라는 제목으로 20운韻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있게 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규장각]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무관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했으니,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제수되었는데, 사근역沙斤驛에는 해묵은 공채公債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公費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上官[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驛民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옮겼다.

6월에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靑鶴洞이 있었는데 고송古松과 백석白石이 그윽하여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으나 다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두어 칸을 얽고 우취옹정又醉翁亭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두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손수 만들어 여가 있을 때면 홀로 그곳에 가서 유유자적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기유년(1789)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와서 별제瓦署別提로 옮기고, 경술년(1790) 7월에 사도시 주부로 옮기고, 신해년(1791) 2월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옮기고, 3월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옮기고, 5월에 사옹원 주부로 옮겼다.

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기질이 본래 부녀자나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였는데, 나이가 거의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손상된 지 오래였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계축년(1793) 1월 25일이요,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일찍이 저서 12종이 있었다. 

《영처고嬰處稿》는 바로 젊은 시절에 지은 시와 산문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신하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했는데, 그래서 원고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청장관고靑莊館稿》의 ‘청장’은 바로 해오라기 별명인데,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기 때문에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무관이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곧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옛날의 어진 이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하여 훈계의 말씀으로 삼고, 지금 사람들의 요새 일들을 기록하여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

《청비록淸脾錄》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시화詩話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상고부터 시작하여 명明 청淸 및 춘추 시대 소국小國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중화와 이적夷狄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청정국지蜻蜓國志》는 일본의 세계世系ㆍ지도ㆍ풍속ㆍ언어ㆍ물산을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盎葉記》는 곧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고증하고 변증한 말들을 모은 것이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은 경상도에서 역승驛丞[찰방])으로 재직할 때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기억禮記臆》은 《예기》의 어려운 글자나 의심나는 뜻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송사보전宋史補傳》은 곧 하교를 받들어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집ㆍ교열한 것으로서, 유민열전遺民列傳과 고려열전高麗列傳ㆍ요열전遼列傳ㆍ금열전金列傳ㆍ몽고열전蒙古列傳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는 많은 서적을 열람하면서 명 나라 말 유민遺民들 행적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매번 문헌을 편찬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무관이 참여하였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ㆍ《갱장록羹墻錄》ㆍ《문원보불文苑黼黻》ㆍ《대전통편大典通編》 같은 종류가 그것이다.

또 일찍이 어명을 받들어 운서韻書를 편찬하여 진상하였으니, 이름을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 하였다.

자획字畫은 모두 육서六書를 쓰고, 주석은 제가諸家의 운서를 참고하여 협운叶韻과 통운通韻까지 자상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관은 이 일을 마치고 죽었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功懋와 아들 광규光葵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오늘 운서를 인쇄하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작고한 검서관 이 아무의 재주와 학식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들이 이미 탈상했다고 아뢰니, 그를 검서관에 특별히 임명하라.” 

하고, 또 돈 500냥을 하사하시어 유고를 출간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 각신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현재 장임將任[대장이나 장수], 지방 관직, 관찰사, 큰 고을 수령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각자 능력껏 출간 비용을 돕도록 하고, 가까운 친척인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도 일체가 되어 출간 비용을 대는 것을 돕도록 하교하였다.

이날 임금께서 광규에게 입시토록 명하였으며, 은혜로운 하교가 정중하였다. 

일족과 친구들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무관이 평소에 제 몸을 깨끗이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하며 편찬하는 일로 수고가 많았는데, 죽은 뒤에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그 가난을 염려하여 마침내 그의 아들을 등용하고 유고를 출판하라는 명을 내리셨구나!

이렇게 큰 은혜와 영광이 내린 것은 구천九泉에 간 망인을 깊이 감격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분발하게 할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하였다.

무관은 수성 백씨隋城白氏[수성은 수원水原]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따님이요, 증贈 호조 판서 행 평안 병사行平安兵使)로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인 시구時耈의 증손녀이다.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광규요, 두 딸은 전주全州 유선柳烍과 광산光山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광규의 자녀는 아직 어리다.

아, 무관은 품행이 독실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서 만물을 정밀히 연구하기에 넉넉하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내면의 수양에 독실하여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끊었고, 본체本體[마음의 본바탕]가 맑고 투철하며 그 용用[마음의 활동]은 섬세하고 빈틈이 없었다.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은 모두 그가 부지런히 힘을 쏟던 것이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에서 널리 취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독창적인 경지를 홀로 추구하고 진부한 것은 따라 배우지 않았다.

기이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진실되고 절실함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며, 순박하고 성실하면서도 졸렬하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라도 한번 읽어 보기만 하면 완연히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고 명물名物을 명백히 분석하기로 말하자면, 전무후무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관은 가난한 선비 시절부터 민생이 곤궁하고 인재가 묻히고 마는 데 깊은 관심을 쏟아서, 개연慨然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의 논설과 기록은 법령과 제도에 특히 치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런즉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뜻을 잠깐 사이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를 기용하여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면, 장차 어디건 안 될 곳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도하게 유행하는 풍속을 싫어하고 마음의 본바탕이 자유롭고 트인 것을 좋아하여, 뜻을 굳건히 지키고 운명을 믿어 담담히 욕심이 없으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수하였다.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지위 높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지녀, 하마터면 불우한 채 늙어 죽어 그대로 묻힌 채 이름이 후세에 일컬어지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정치를 천명하고 인재 뽑는 길을 넓히사, 무관이 궁벽한 여항에 사는 한낱 가난한 선비인데도 날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되니, 성상은 이미 그가 오래 쌓아온 학식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구중궁궐에 달려나가 문헌의 편찬 사업에 이바지하였으니,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성상이 유독 아셨고,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못한 것을 성상이 유독 기특하게 여기신 것이었다. 

그의 처지는 한낱 소원하고 지위 낮은 관원이었으나 그의 소임은 규벽奎璧을 맡는 것이었고, 그의 관직은 한낱 유품流品[잡다한 하급 관직]이로되 그의 일은 성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전후로 부지런히 장려하시고 후하게 하사하신 은혜는 지위 높은 신하도 얻기 힘든 바였으니, 무관이 성상으로부터 입은 지우知遇도 성대하다 하겠다.

벼슬길이 순탄치 못해 관직이 한낱 현감에 그치고, 타고난 수명이 짧아 역량을 당세에 펴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죽은 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운명이지 때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성상은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그의 재주와 학식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내탕전內帑錢으로 유고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 그의 검서 관직을 그의 아들이 물려받게 하셨으니,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은총을 입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옛사람을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임금에게 이와 같은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관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그의 유집을 편찬하면서, 내가 무관의 평생 사적을 잘 안다고 하여 행장을 짓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주-D001] 형암(炯菴) 행장(行狀) : 이덕무의 삼년상이 끝난 정조 19년(1795) 4월, 왕은 그의 유고(遺稿)를 정선(精選)하여 활자로 인쇄하고 그 서문과 발문 및 묘지(墓誌)와 묘갈(墓碣) 등은 글 짓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누어 짓도록 명하면서, 행장은 연암이 지어 바치도록 특별히 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12월부터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의 인쇄를 시작했으나, 서문과 묘문(墓文) 및 행장이 지어지기를 기다려 정조 21년(1797) 2월에야 인쇄를 끝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연암이 지은 행장은 간본 《아정유고》에 수록된 것과 《연암집》에 수록된 것이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행장이 연암의 초고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원문의 ‘炯菴’이 ‘李懋官’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2] 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적성 현감 부군 연보(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에는 이덕무가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이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주-D003] 명물도수(名物度數) : 명물은 각종 사물의 명칭과 특징을 가리키고, 도수는 계산을 통해 얻은 각종 수치를 말한다.

[주-D004] 금석비판(金石碑板) : 금석은 글자가 새겨진 동기(銅器)와 비석을 말하고, 비판은 비석의 탁본인 비첩(碑帖)을 가리킨다. 역사학과 문자학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주-D005] 마침내 …… 못했어도 : 시관(試官)에게 합격자로 뽑히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덕무는 33세 때인 1773년(영조 49)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1779년(정조 3)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에 임명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주-D006] 영릉(英陵)의 옛일 : 세종 2년(1420)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 임금께서 …… 내리셨다 : ‘규장각 팔경’을 짓고는 《명의록(明義錄)》 1질을 특별히 하사받았고, ‘영주에 오르다’를 짓고는 백면지(白綿紙) 다섯 묶음을 하사받았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이 두 시는 모두 《청장관전서》 권20 간본 《아정유고》 12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8] 사근역(沙斤驛) : 경상도 함양(咸陽)에 있던 역참(驛站)이다.

[주-D009] 공채(公債) : 백성들이 나라에 진 빚을 말하는데, 대개 환곡을 갚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주-D010] 적성 현감(積城縣監) : 적성은 경기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이다.

[주-D011] 우취옹정(又醉翁亭) : 송(宋)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저주 지사(滁州知事)로 재임할 적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즐겁게 잔치를 벌인 일을 기록한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주-D012] 《영처고(嬰處稿)》는 …… 것이다 : 연암이 《영처고》에 대해 지은 서문이 《연암집》 권7에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가 지은 자서(自序)는 그의 나이 20세 때인 1760년에 지은 것이다.

[주-D013] 《청장관고(靑莊館稿)》의 …… 있어서였다 : 《청장관고》는 《청장관전서》와는 다르다. 간본 《아정유고》에 실린 행장에 의하면, 이덕무의 첫 번째 문집〔其初集〕의 이름이 《영처고》이고, 두 번째 문집〔其二集〕의 이름이 《청장관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청장관전서》 중의 필사본 《아정유고》를 가리킨다. 청장은 일명 신천옹(信天翁 : 앨버트로스)이라고 하는 해조(海鳥)로서, 해오라기〔鵁鶄〕와는 별종이다. 《연암집》 권1 담연정기(澹然亭記) 참조. 연암이 지은 행장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의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이 대목과 같이 오류를 포함한 채 그대로 전재(轉載)하기도 했다. 

[주-D014] 《송사보전(宋史補傳)》은 …… 것이다 : 《송사보전》은 《청장관전서》 중 《편서잡고(編書雜稿)》에 수록되어 있다.

[주-D015] 자획(字畫)은 …… 쓰고 : 상형(象形)ㆍ지사(指事)ㆍ회의(會意)ㆍ형성(形聲)ㆍ전주(轉注)ㆍ가차(假借) 등 한자(漢字)의 여섯 가지 조자법(造字法)에 따라서 속자(俗字)나 위자(僞字)를 배제하고 정자(正字)만을 썼다는 뜻인 듯하다. 이광규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이덕무가 육서에 능통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속자나 위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획이 비록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없을지라도, 육서를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 만약 체세(體勢)만 숭상하고 그 자의(字義)를 모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주-D016] 협운(叶韻)과 통운(通韻) : 당시의 음(音)으로 고대의 운문을 읽을 경우 운이 맞지 않는 글자의 음을 운에 맞도록 임시로 고쳐 읽는 것을 협운이라 한다. 주자(朱子)가 《시경》이나 《초사(楚辭)》를 해석할 때 협운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운은 한시를 지을 때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운부(韻部)를 말한다. 예컨대 평성(平聲) 동운(東韻)과 동운(冬韻)에 속하는 글자들은 서로 운자(韻字)로 통용될 수 있다.

[주-D017] 담제(禫祭) : 삼년상(25개월)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D018] 초계문신(抄啓文臣) : 37세 이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켜 40세 이전까지 학문과 문장 연마에 전념하도록 한 문신을 말한다.

[주-D019] 이날 …… 정중하였다 : 정조 19년(1795) 4월 3일, 왕은 이광규에게 부친 이덕무의 유고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유고를 간행할 비용이 곧 조처될 것인데 집이 가난하다 하니 유고를 간행하고 남는 것은 생활비로 쓰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유고를 정선(精選)하는 일은 각신 윤행임尹行恁에게 맡겼노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주-D020] 품행이 독실하여 : 원문은 ‘行義敦篤’인데, ‘敦’ 자가 ‘淳’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21] 안자(顔子)의 …… 삼성(三省)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물(勿)’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에서 성실하지 못한 점은 없었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論語 學而》

[주-D022] 권세 …… 않아 : 원문에는 ‘足不到’ 다음에 두 글자가 결락되었는데, ‘권문(權門)’과 같은 단어가 아닌가 한다. 문맥에 비추어 번역하였다.

[주-D023] 남들이 …… 않으려는 : 《논어》 학이(學而)에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주역》 대과(大過)에 “군자는 대과(大過)의 괘를 얻으면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獨立無懼〕 숨어 살게 되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D024] 규벽(奎璧) : 임금의 친필과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임금의 친필과 인장을 관리하는 곳으로 세워졌다.

[주-D025] 후하게 하사하신 은혜 : 이덕무가 벼슬한 지 15년 동안 왕으로부터 책ㆍ옷감ㆍ음식ㆍ채소ㆍ과일ㆍ생선ㆍ약 등 모두 139종의 물품을 총 520여 번이나 하사받았다고 한다. 《刊本雅亭遺稿 卷8 先考府君遺事》 

[주-D026] 순탄치 못해 : 원문은 ‘崚嶒’인데, ‘嶒’ 자가 ‘𡾓’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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