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관료 출신이나 학문, 충렬, 학행이 뛰어난 이에게 시호를 내렸다. 시호는 당사자의 삶의 행적을 살펴 두 글자로 정했는데, 본래 훌륭한 사람에게는 좋은 시호를, 못된 사람에게는 나쁜 시호[惡諡]를 정해주어 경계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
주나라 여왕(厲王)과 유왕(幽王)의 시호가 바로 대표적인 악시이다. 후대에 악시는 사라졌다.
어떤 인물에게 ‘시호가 내려지는가’ 와 또 ‘어떤 시호가 내려지는가’는 그 가문이나 학파, 정파 등 관련 인물에게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성종 때에 김종직이 사망하자 그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정하였는데, 반대파에서 온당치 않다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문(文)을 숭상하는 유학적 사고에서는 ‘문’ 자 시호를 선호하였고, 그중에서도 ‘도덕을 갖추고 학문이 넓다[道德博聞]’는 뜻의 ‘문’을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김종직의 시호에 이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을 적용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결국, 시호 담당 관원이 처벌되고 김종직의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더군다나 개정된 시호의 ‘문’은 ‘학문이 넓고 식견이 많다[博聞多見]’는 의미로 위상이 앞서 것과 달라 그 격을 낮추었다.
그러나 김종직의 시호는 숙종 34년에 이르러서 처음에 정했던 문충으로 다시 개정되었다. 김종직이 사망한 지 220여 년이나 지난 때였다.
장성의 문정공(文正公) 하서 김인후 선생도 애초 시호는 문정(文靖)이었으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 격을 높일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선조나 학파의 주요 인물에 文자 시호를 원했으며 그 문의 뜻도 [道德博聞]이기를 원했다. 다시 말해 같은 문 자 시호라도 내릴 때 그 뜻이 무엇이었느냐는 별개였다는 것이다.
시호교지(諡號敎旨)에는 그 시호가 어떤 뜻인지 기록되어 있었다.
《逸周書》 〈諡法解〉를 보면 같은 글자가 어찌 다른지 알 수 있다.
참조 : https://blog.naver.com/hochulki/221413989927
첨부한 자료는 노사 기정진 선생의 시호칙명(諡號勅命)이다. 대한제국이므로 교지를 칙명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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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植이 補한다.
文에만 치우쳐 武를 멀리하다가 병약해 빠지는 현상을 문약文弱이라 한다. 이 문약은 구한말 이래 민족주의자들한테서 조선이 멸망하는 원인으로 주목되기 시작하는데, 그 반대편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상무정신尙武精神 부활을 부르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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