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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리里는 도대체 몇 호가 기준이었을까? 오늘날 장성 황룡면 아곡리는 《세조실록》에는 소곡리小谷里로 나오고 조선후기에도 오래도록 소곡리였다가 정조 연간에 소곡리와 북문리, 하남리 셋으로 나뉘었다.
북문리는 암탉골이라는 곳으로 탁곡卓谷으로 표기했는데, 아곡리 자동차캠핑장 주차장에 사창社倉이 만들어지고 그 북문 쪽이라고 하여 북문리가 되어 '북너메'로 불린다.
하남리는 우리집 하남정사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하남정사와 아래 작은집 입재立齋-나중에는 성재省齋로 바뀜-를 이르는 마을이름이다.
호제노호(戶第奴戶)까지 포함해도 모두 6집 정도인데, 하나의 리가 된다.
도통 알 수가 없다.
사진은 1789년 《호구총수 戶口總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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