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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오도일吳道이 기생 추향秋香의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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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일(吳道一, 1645~1703), 기생 추향(秋香)의 손녀 추성개(秋聲介)와 현손녀 가련(可憐)에게 준 시]

명기(名妓)는 손녀와 현손녀까지도 칭송하고 사후 1백여 년 이상 지났어도 문사들이 성묘를 했었다.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은 1702년 여름 장성으로 귀양을 와서 7개월 만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장성에 유배 중에 남긴 시문을 모은 것이 〈오산록(鰲山錄)〉으로  그의 문집인 《서파집(西坡集)》  권8에 수록됐다.

그는 장성의 명기 추향의 손녀와 현손녀를 만나 시 두 수를 남겼다. 시는 아름답게만 그려졌는데, 실상은 심했던 듯하다.

《숙종실록》 29년 2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오도일(吳道一)이 장성(長城) 배소(配所)에서 죽었는데 59세였다. 오도일은 본래 방탕하고 몸을 단속함이 없었는데, 만년(晩年)에는 더욱 방자하고 패악해 다시 사람의 도리가 없었다.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더욱 뜻을 잃고 슬퍼하여 오로지 술로써 스스로 마음을 풀었는데, 취하면 문득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 당류(黨類)인 읍재(邑宰)가 관동(官僮)과 관기(官妓)를 보내어 부리도록 주었는데, 오도일은 이들을 모두 발가벗겨, 그가 함께 쫓아다니며 희롱하므로 사람들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가서 보자 또 억지로 옷을 벗게 하였으나, 그 사람이 달아나서 겨우 면하였는데, 남쪽 사람이 침을 뱉고 꾸짖으며, ‘사람 짐승’으로 지목하였다. 젊어서는 자못 청백하다고 스스로 일컬었는데, 만년에는 명(命)을 기다린다고 일컬으며 부상(富商)의 집에 붙여 살면서, 날마다 술과 고기를 마련하게 하고 요구가 끝이 없어 상인이 크게 원망하였다. 종실(宗室)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은 행동이 개돼지와 같아서 사람들 사이에 끼이지 못하였는데, 오도일은 그 부(富)를 탐하여 아들을 장가들게 하니, 그 당류들도 이를 더럽게 여겼다.”

라고 하였으니, 기생 문제가 사실무근은 아니었던 듯하다.

내용에 나오는 당류(黨類)인 읍재(邑宰)는 당시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만동(李萬東, 1643~1707)으로 같은 소론으로 편의를 봐준 것은 확실하다.

서파가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체결하여 남인 소론의 권력을 도모하여 유배되었고 행실에 조금의 흠결이 있었지만, 문재(文才)로는 탁월하다.

시는 아래 링크에서

https://blog.naver.com/hochulki/22258583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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