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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野望은 어떻게 '야망'이 되었나? : 왕적전(王績傳)을 겸하여

by taeshik.kim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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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틈나는 대로 전당시(全唐詩)를 훑어 보고 있거니와, 그 권37에는 隋末~唐初 교체기를 살다간 왕정(王績)이란 사람이 남긴 시가 集積해 있으니, 우선 그의 행적을 보면 생몰 연대가 585~644년이니 수 문제 시대에 태어나 당 태종 연간에 죽었음을 안다. 


字를 무공(無功)이라 했거니와, 《全唐文》 卷123에 수록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왕적이란 사람은 부모가 있으나 친구가 없어 스스로 그를 위해 字를 지어 가로대 무공이라 했다(王績者, 有父母, 無朋友, 自爲之字曰無功焉)고 한다. 舊唐書 卷192 列傳 第142 隱逸 항목에 수록된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으로 어릴 적에는 李播ㆍ呂才와 더불어 莫逆하게 사귀었다.隋 大業 연간에 孝悌廉潔에 應하여 천거되고 揚州六合縣丞에 제수되었으나 이것이 그가 내키는 것은 아니어서 벼슬을 버리고는 鄕里로 돌아갔다.績河渚中先有田數頃, 隣渚에 隱士 仲長子先이 있어 服食 養性하니, 績이 그 眞素를 重히 여기고 願하여 相近하려 하니, 이에 結廬河渚하고 琴酒로써 自樂을 삼았다.일찍이 北山에 遊했다가 因하여 北山賦를 지어 뜻을 내보이니 詞는 많아서 여기서 싣지 않는다.績이 일찍이 몸소 東皋에서 밭을 갈아 농사지으니 時人들이 號하여 동고자(東皋子)라 했다.或시라도 酒肆를 지날 때면 動經數日하기도 했으며, 往往 題壁作詩하니 대체로 好事者를 위해 諷詠한 것이었다.貞觀 十八年에 卒하니 臨終에 自剋하여 死日하는 날에 遺命하기를 薄葬하라 하고, 兼하여 미리 자기 墓誌를 지어두기도 했다.文集 5卷이 있으며 또한 隋書를 撰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卒하였다.

 

王績字無功, 絳州龍門人.少與李播ㆍ呂才爲莫逆之交.隋大業中, 應孝悌廉潔擧, 授揚州六合縣丞, 非其所好, 棄官還鄕里.績河渚中先有田數頃, 鄰渚有隱士仲長子先, 服食養性, 績重其眞素, 願與相近, 乃結廬河渚, 以琴酒自樂.嘗遊北山, 因爲北山賦以見志, 詞多不載.績嘗躬耕於東皋, 故時人號東皋子.或經過酒肆, 動經數日, 往往題壁作詩, 多爲好事者諷詠.貞觀十八年卒.臨終自剋死日, 遺命薄葬, 兼預自爲墓誌.有文集五卷.又撰隋書, 未就而卒.

 

이로써 왕적이 왜 은일전에 수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데 내가 이번 전당시 수록 왕적 시 중 흥미를 느낀 것이 ‘野望’이란 제목 아래 전문이 수록된 작품이었다.

 

東皐薄暮望 동쪽 언덕에 올라 해 저물 쯤 바라보니

徙倚欲何依 옮겨 살고 싶지만 어디다 기대야 할까?

樹樹皆秋色 나무마다 모두 가을 색 띠고

山山唯落暉 산마다 오직 지는 햇살뿐

牧人驅犢返 목동은 송아지 몰아 돌아오고

獵馬帶禽歸 사냥 나선 말은 잡은 새 메고 돌아오네

相顧無相識 서로 돌아보나 아는 이 없어

長歌懷采薇 길게 노래하며 고사리 캘 생각하네

 

古人은 시를 지을 적에 제목을 따로 부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이 시 또한 ‘野望’이란 제목을 왕적이 직접 붙인 것인지, 아니면 후대 누군가가 그 내용을 보고 대강 때려 맞추어 부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왜 野望을 주목했는가? 이 시에 구사한 野望이 현재의 野望과 완전히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이 1999년 완성한 《표준국어대사전》은 표제어 ‘야망’(野望)을 이렇게 설명한다.

 

「명」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 ¶정치적 야망/헛된 야망을 품다/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아무리 상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처럼은 살아 보고 싶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유현종, 들불≫/ 그가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야망으로 북양 함대를 창설한 지도 벌써 6년이 된다.≪유주현, 대한제국≫ §

 

野望은 글자 그대로는 분명 들녘에서 멀리 조망한다는 뜻이다. 이 望이라는 글자에는 遠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初唐 시인 왕적의 ‘野望’은 야망 글자 본래 의미로 사용된 경우다. 이런 야망이 언제부터 도대체 Ambition을 의미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혹여 일본쪽에서 들여온 의미가 아닌가 생각되지만, 나는 아직 그 뿌리를 조사해 보지 못했다.

 

한데 이 野望이란 말이 왕적이 활약한 唐代에는 항용 사용하는 일상어임을 같은 전당시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 예컨대 왕발王勃의 시에 ‘조춘야망早春野望’(이른 봄 들에서 바라보며)라는 제하 시가 있으니 참고 삼아 그 전문을 보건대

 

江曠春潮白

山長曉岫靑

他鄕臨睨極

花柳映邊亭

 

라 했으며, 아울러 이들과 활동 연대가 대체로 겹치는 낙빈왕(駱賓王) 시에도 ‘동일야망’(冬日野望. 겨울날 들에서 바라보며)이 있으니, 이 또한 가사를 보건대

 

故人無與晤

安步陟山椒

野靜連雲卷

川明斷霧銷

靈岩聞曉籟

洞浦漲秋潮

三江歸望斷

千里故鄕遙

勞歌徒自奏

客魂誰爲招

 

이라 했다. 이 野望은 결국 삼월 上巳日이나, 중구절 습속과도 일면 연동할 듯하지만 이런 의문은 차후로 미뤄둔다. 한편 왕적에 관한 자료는 앞선 인용문까지 포함하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王績

自撰墓誌銘 五斗先生傳 無心子傳並序 

自撰墓誌銘(摘自全唐文 卷一百二十三)

 

王績者, 有父母, 無朋友, 自爲之字曰無功焉. 人或問之, 箕踞不對, 蓋以有道於己, 無功於時也. 不讀書, 自達理. 不知榮辱, 不計利害. 起家以祿位, 歷數職而進一階. 才高位下, 免責而已. 天子不知, 公卿不識. 四十五十, 而無聞焉. 於是退歸, 以酒德游於鄕裡. 往往賣卜, 時時著書. 行若無所之, 坐若無所據. 鄕人未有達其意也. 嘗耕東皋, 號東皋子. 身死之日, 自爲銘焉. 曰 ;:

 

有唐逸人, 太原王績. 若頑若愚, 似驕似激. 院止三逕, 堂唯四壁. 不知節製, 焉有親戚. 以生爲附贅懸疣, 以死爲決疣潰癰. 無思無慮, 何去何從? 壟頭刻石, 馬鬣裁封. 哀哀孝子, 空對長空. 

 

五斗先生傳(摘自全唐文 卷一百二十三) 

有五斗先生者, 以酒德游於人間. 有以酒請者, 無貴賤皆往, 往必醉, 醉則不擇地斯寢矣. 醒則複起飲也. 常一飲五斗, 因以爲號焉. 先生絕思慮, 寡言語, 不知天下之有仁義厚薄也. 忽焉而去, 倏然而來. 其動也天, 其靜也地, 故萬物不能縈心焉. 嘗言曰:「天下大抵可見矣. 生何足養, 而嵇康著論;途何爲窮, 而阮籍痛哭. 故昏昏默然, 聖人之所居也. 」遂行其誌, 不知所如.

 

無心子傳並序(摘自全唐文 卷一百二十三) 

東皋子始仕, 以醉懦罷. 鄕人或誚之, 東皋子不屑也, 退著無心子以見趣焉. 無心子寓居於越, 越王不知其大人也, 拘之仕, 無喜色, 泛若而從. 越國之法, 曰﹕有穢行者不齒. 俄而無心子者以穢行聞於王, 王黜之, 無慍色, 退而將游於茫蕩之野. 適績之邑, 而遇機士. 機士撫髀而嘆者三, 曰:「嘻, 子賢者而以罪廢! 無心子不應. 機士曰:「願受教. 」無心子曰:「爾聞蜚廉氏之馬說乎? 昔者蜚廉氏有二馬. 一者朱鬣白毳, 龍骼鳳臆, 驟馳如舞, 終日不釋鞍, 竟以藝死. 一者重脛昂尾 , 駝頸貉膝, 踶善蹶, 棄而散諸野, 終年肥遁. 是以鳳凰不憎山棲, 蛟龍不羞泥蟠; 君子不苟潔以罹患, 聖人不避穢而養生. 」 

東皋子聞之, 曰:「善矣! 盡矣! 不可以加之矣! 」

 

舊唐書列傳卷一百九十二列傳第一百四十二隱逸王績 

王績字無功, 絳州龍門人.少與李播ㆍ呂才爲莫逆之交.隋大業中, 應孝悌廉潔擧, 授揚州六合縣丞, 非其所好, 棄官還鄕里.績河渚中先有田數頃, 鄰渚有隱士仲長子先, 服食養性, 績重其眞素, 願與相近, 乃結廬河渚, 以琴酒自樂.嘗遊北山, 因爲北山賦以見志, 詞多不載.績嘗躬耕於東皋, 故時人號東皋子.或經過酒肆, 動經數日, 往往題壁作詩, 多爲好事者諷詠.貞觀十八年卒.臨終自剋死日, 遺命薄葬, 兼預自爲墓誌.有文集五卷.又撰隋書, 未就而卒. 

 

新唐書列傳卷一百九十六列傳第一百二十一隱逸王績 

王績字無功, 絳州龍門人.性簡放, 不喜拜揖.兄通, 隋末大儒也, 聚徒河ㆍ汾間, 倣古作六經, 又爲中說以擬論語.不爲諸儒稱道, 故書不顯, 惟中說獨傳.通知績誕縱, 不嬰以家事, 鄕族慶弔冠昏, 不與也.與李播ㆍ呂才善. 

大業中, 擧孝悌廉絜, 授祕書省正字.不樂在朝, 求爲六合丞, 以嗜酒不任事, 時天下亦亂, 因劾, 遂解去.歎曰:“網羅在天, 吾且安之!” 乃還鄕里.有田十六頃在河渚間.仲長子光者, 亦隱者也, 無妻子, 結廬北渚, 凡三十年, 非其力不食.績愛其真, 徙與相近.子光瘖, 未嘗交語, 與對酌酒懽甚.績有奴婢數人, 種黍, 春秋釀酒, 養鳧鴈, 蒔藥草自供.以周易ㆍ老子ㆍ莊子置床頭, 佗書罕讀也.欲見兄弟, 輒度河還家.游北山東皋, 著書自號東皋子.乘牛經酒肆, 留或數日. 

高祖武德初, 以前官待詔門下省.故事, 官給酒日三升, 或問:“待詔何樂邪?” 答曰:“良醞可戀耳!” 侍中陳叔達聞之, 日給一斗, 時稱‘斗酒學士’.貞觀初, 以疾罷.復調有司, 時太樂署史焦革家善釀, 績求爲丞, 吏部以非流不許, 績固請曰:“有深意.” 竟除之.革死, 妻送酒不絕, 歲餘, 又死.績曰:“天不使我酣美酒邪?” 棄官去.自是太樂丞爲淸職.追述革酒法爲經, 又采杜康ㆍ儀狄以來善酒者爲譜.李淳風曰:“君, 酒家南ㆍ董也.” 所居東南有盤石, 立杜康祠祭之, 尊爲師, 以革配.著醉鄕記以次劉伶酒德頌.其飲至五斗不亂, 人有以酒邀者, 無貴賤輒往, 著五斗先生傳.刺史崔喜悅之, 請相見, 答曰:“奈何坐召嚴君平邪?” 卒不詣.杜之松, 故人也, 爲刺史, 請績講禮, 答曰:“吾不能揖讓邦君門, 談糟粕, 棄醇醪也.” 之松歲時贈以酒脯.初, 兄凝爲隋著作郞, 撰隋書未成死, 績續餘功, 亦不能成.豫知終日, 命薄葬, 自誌其墓. 

績之仕, 以醉失職, 鄕人靳之, 託無心子以見趣曰:“無心子居越, 越王不知其大人也, 拘之仕, 無喜色.越國法曰:‘穢行者不齒.’ 俄而無心子以穢行聞, 王黜之, 無慍色.退而適茫蕩之野, 過動之邑而見機士, 機士撫髀曰:‘嘻! 子賢者而以罪廢邪?’ 無心子不應.機士曰:‘願見敎.’ 曰:‘子聞蜚廉氏馬乎? 一者朱鬣白毳, 龍骼鳳億, 驟馳如舞, 終日不釋轡而以熱死;一者重頭昂尾, 駝頸貉膝, 踶齧善蹶, 棄諸野, 終年而肥.夫鳳不憎山栖, 龍不羞泥蟠, 君子不苟絜以罹患, 不避穢而養精也.’” 其自處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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