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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가축 사육은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by 초야잠필 2022.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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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소파동 돼지파동 등이 있어 가축 값이 폭락하는 경우가 있지만,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우리 조상이라 해서 가축은 닥치고 사육하면 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던것 같다.

쌀농사가 한반도로 도입된 후에도 상당기간 가축사육이 이 땅에서 시작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우리에게 쌀농사를 전해준 중국 화북지역은 이미 신석기시대에 가축사육이 정착한 모습을 보여 그 기술적 전통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왜 농경+가축사육의 복합체에서 하필이면 벼농사만 홀랑 뽑아 들어왔을까? 그리고 왜 그 긴 기간 가축은 제대로 도입되지 못했을까?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첫째. 굳이 단백질원 공급을 위해서라면 야생동물 사냥감이 지천에 널려있었다는 점.

닭대신 꿩(꿩 대신 닭인가?) 이라는데, 실제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사방에 꿩이 천지였다. 조선시대 일기를 보면 한번 사냥나가면 꿩 백마리는 기본적으로 잡아 들여오는 기록도 보인다.

닭을 키울 때 들어가는 노동력과 사료 등을 생각하면 차라리 때 되면 한번씩 꿩 사냥이나 나가면 그게 더 수지 맞는 셈이다. 실제로 이때문에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닭보다 꿩을 많이 먹었다.

이 점은 옆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로 닭 고기 맛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개항하여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구한말에는 닭고기보다 꿩고기가 더 가격이 낮았다는 기록도 있으니 한국의 전설적 치킨 산업의 전통은 채 백년도 안 되는 셈이다.

이 점, 소나 돼지 등 네발 짐승 고기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 발굴 유적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야생동물 뼈 중 하나가 사슴뼈다.

육고기를 위해서라면 굳이 소 돼지를 장기간 키울 필요가 없다. 사슴이 지천이라. 그냥 활들고 나가 사슴잡아 오면 되는 것이다.

단백질 공급원의 측면에서는 사육동물은 별로 매력적인 선택이 적어도 당시에는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 닭사육의 변천 양상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아래 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김지은 등. 동아시아 닭사육의 확립과정 및 그 역사적 전개 (동양학)

申東勳・金智恩・洪宗河・李陽洙 「朝鮮時代の日記史料から推定したニワトリの消費様相」 『動物考古学』第39号


둘째. 농사일과 수레 끄는 일에 소를 쓴다던지, 군사작전이나 교통용으로 말을 쓰는 등의 노동력 활용을 위한 동물 사육이 아직 당시 사회의 수준에서 본 궤도에 올라가지 못한 탓이다.

이때문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전에는 마한 지역 사람들이 소 말은 키우는데 탈 줄 모른다고 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 일부 지역의 상황이었고 당장 진한 지역만 해도 소, 말은 타고 다닌 것 같고, 한반도 북부 지역은 또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각설하고-.

동물 사육은 단백질 공급의 측면에서는 인구가 급증하고 개간된 토지가 늘어 야생동물의 숫자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매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야생동물이 많이 살수 있는 황무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정기적 사냥으로 고기 충당이 가능하다면 굳이 동물 사육의 매력은 떨어진다.

마을-농경지와 또 다른 마을-농경지 사이에 공지가 많이 남아 그 곳에 야생동물이 가득하면 할수록 동물 사육의 동기는 줄어든다.

중국도 상왕조 말기까지는 막대한 양의 야생동물이 사냥으로 획득되어 소비되고 있었으며 사육 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데 (제사에만 사용) 이러한 상황과 유사하다 하겠다.

다음으로 사회가 발전하여 축력을 농사에 이용하거나 원거리 교역과 이동이 늘어 소와 말을 교통용으로 사용하게 되면 사육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와 말 사육이 삼국시대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이유는 육고기 공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목적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 원삼국시대까지는 이처럼 노동력 이용을 위해 동물을 사육해야 하는 동기가 매우 적었던 것 아닐까.

신라 지증왕때 처음으로 "소로 밭갈게 (우경)"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결코 잘 못된 내용이 아닌 셈이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야생동물을 대체할 단백질원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하고 축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소, 돼지, 말 등이 원삼국시대 이전에 아예 사육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원전 초기철기시대까지는 우리나라 가축 사육의 개시 연대가 무난히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제사용 희생"에 있다.

한국에서 사육동물의 초창기 용도로 가장 큰 것은 바로 "제사를 위한 희생용 동물"의 용도였다고 보는데 사실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황하유역에 소가 도입된 초창기에는 그 사육의 목적은 "갑골점복의 견갑골 공급"과 "제사용 희생"이 주목적이었다.

소 사육이 대규모화하여 사람들의 입맛을 달래기 시작 한것은 그것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고구려 벽화 수렵도. 사슴을 쏘고 있다. 이 장면을 단순히 고구려 무사들의 스포츠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사슴은 당시 사람들의 가장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 호랑이는 가죽때문에 잡고 있었을 것 같다. 조선시대까지도 무인들의 사냥은 단백질 공급원을 찾는 측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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