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상하는 시골 풍경은 기껏해야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1970년대 농촌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 당시 농촌이란 이미 수천 년에 걸친 변화가 축적된 최종 결과물이었으므로 이 시대의 정경을 가지고 수천년 전의 마을 풍경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라 하겠다.
우리나라 마을 풍경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라 본다.
시대 추이에 따라 마을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1. 신석기시대: 밭 + 개 사육 (기본적으로 수렵채집)
2. 청동기시대: 논농사 + 누에치기 + 개 사육 + 돼지는 청동기시대 말기 쯤 시작되었을 가능성 있음 (확신 못함).
3. 초기철기시대: 논농사+ 누에치기+개+돼지+말+소+닭 사육. 말, 소, 닭 등 상당수의 가축이 이 시기에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가축사육은 아직 완전히 정착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4. 원삼국시대: 논농사+누에치기+개+돼지+말+소+닭 사육본격화.
이에서 볼수 잇듯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는 개 말고는 가축이 없었다. 돼지는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아직 근거가 매우 희박하여 확신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마을풍경에서 가축이 총출동하여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초기철기시대부터이지만, 원삼국시대까지도 제대로 사육이 정착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사육을 했다해도 그 숫자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초기철기시대 말+원삼국시대 초기 경부터 일본으로 가축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닭과 돼지가 흘러들어갔을 것 같고, 말과 소는 고분시대나 되어야 일본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삼국지 한전과 왜인전을 보고 도작농경이 본궤도에 올라간 사회에서 말과 소를 타지않고 제사에만 썼다던가 (한전) 아니면 말하고 소는 아예 없다 (왜인전)는 기술을 보고 생소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없으니 없었다고 한 것이고 탈 줄 모르니 모른다고 한 것이다.
가축사육을 풀셋트로 장착한 우리가 알고 있는 농촌마을은 생각보다 그 성립 시기가 매우 늦다. 물론 중국은 빨랐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에치기는 지금 한국학계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도작농경의 도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을 거라고 나는 본다.
도작 농경이 가능한 정도 수준의 사회라면 누에는 당연히 기를 수 있다. 기술적 난이도가 도작이 누에치기보다 낮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야요이시대 일본에는 다른 가축은 하나도 없어도 누에는 이때 이미 키워 옷감을 짜고 있었다.
야요이시대의 누에도 아마 도작농경과 함께 한반도에서 들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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