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에서부터 거란군을 맞아 승승장구한 강감찬은 마침내 현종 10년, 1018 2월 1일 기축에 김종현과 합세해 귀주성 동쪽 벌판에서 최후의 대승을 거두고는 곧바로 이 기쁨 우리 왕님께 바치겠다 해서 전열을 다시 정비하고는 개경 귀환길에 오르니,
그의 행차는 닷새 뒤인 같은달 6일 갑오에는 이미 예성강을 넘었다. 그 남쪽에 영파역迎波驛이라 해서 주로 공무로 오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국립호텔이 있었다.
하도 기쁨에 계웠던지 강감찬은 쏜살 같이 달렸지만, 개경에서 급보가 내려왔다. 천천히 오란 전갈이었다. 잉? 하는 강감찬한테 현종 특사가 말했다.
왕께서 직접 개선식 시켜준다고 영파역에서 대기하고 계시니 제발 천천히 속도 조절하며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도 준비를 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천천히 오소.
라는 요지였다.
아이고, 이 늙은 놈한테 이 무신 광영이란 말입니까?
하고는 그래도 왕이 어떤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지 못내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 간단한 절차를 물었지만 특사는 이내 쏜살같이 복잡할 거 없습니다. 왕께서 고생했다 하면 아이고 이런 걸로 뭘? 하십면 됩니다 하고는 이내 쏜살같이 온 길을 돌아갔다.
영파역에 이른 강감찬은 삼군三軍을 대동하고는 룰루랄라 한껏 들뜬 기분에 영파역에 들어서려는데 저짝에서 잉? 왕님 행차가 기다리니, 뵙고는 이만큼 뺏아 왔습니다 하고는 노획물을 잔뜩 바치고선 얼굴 들어 역참 건물채를 보니 기둥마다 곳곳에다가 화려한 비단으로 걸쳐 놓고는 풍악까지 울리는데 황송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연회를 베풀어야 하는 법. 이 대목을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는 이렇게 묘사했다.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친히 강감찬 머리에 꽂아준 후 오른손에는 금으로 된 술잔을, 왼손에는 강감찬 손을 잡고서 위로하고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이 절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이어 영파를 흥의興義로 바꾸고 역리驛吏들한테도 공복[冠帶]을 하사하여 주현州縣의 아전들과 동등하게 대해주도록 했다.
실은 이 퍼레이드가 영파역에서 개최되는 바람에 땡잡은 이들은 그 역에 근무하는 지자체 말단 공무원들이었으니 고생했다고 일거에 토호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영파역이라는 데가 어디메쯤인지를 구글어스로 본다.
만으로 표시한 만월대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이며, 예성강이 관통한다.
현재 고속도로가 난 지점을 따라 고려시대에도 교통로가 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꾸불탕꾸불탕하는 예성강이 관통하는 나루임은 확실하다.
고려시대 영파역이 정확이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저 근처 어디메인가는 확실하다.
왜 이 지점을 퍼레이드 행사장으로 삼았을까? 왕이 강을 건너는 일이 오죽 번거로운가? 그래서 현종은 건너기 전, 영파역을 골라 행사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 전쟁 승리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현종은 버선발로 달려갔겠는가?
그만큼 승리가 절실했기 때문이며, 그것도 완성을 강감찬이 가져다주니, 기분이 그야말로 째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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