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를 살짝 비틀어본다면, 이보다 더 다이나믹한 시대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차별받던 서얼, 중인, 서북인 등이 기지개를 펴고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 황제의 측근도 되고 나라걱정에 불타는 개화운동가도 되었던 시절이 개화기였다.
고려 500년의 수도 개성 출신도 이때부터 세상에 이름 드날리는 이가 많아져, 김택영金澤榮(1850-1927) 같은 한문학의 대가가 나오는가 하면 한두어 세대 아래 황종하黃宗河(1887-1952) 4형제나 김인승金仁承(1911-2001), 김경승金景承(1915-1992) 형제 같은 예술가, 마해송馬海松(1905-1966) 같은 문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개성하면 뭐니뭐니 해도 상인의 도시 아니던가.
그런 상업의 전통은 근대에도 이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양정필, <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푸른역사, 2022)이라는 역저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
그런 근대 개성상인의 대표격인 인물이 바로 춘포春圃 공성학孔聖學(1879-1957).
그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선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기업의 성패보다는 민족자본에 의한 향토개발로 일본인들의 자본침략을 극력 반대한 지사형 민족기업가이다."
이 평가에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젖혀두겠지만, 적어도 그가 1910~30년대 개성에서 각종 회사를 창립하여 개성 지역의 실업 발전, 특히 인삼 재배와 가공, 판매를 크게 발전시키려 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간여한 회사만도 7-8개에 달하며, 인삼뿐만 아니라 전기회사, 양조업, 고무회사 등 다방면에 대주주로 참여하거나 사장 또는 감사로 취임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 공진항孔鎭恒(1900-1972)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대농장을 경영했고, 해방 후 프랑스공사, 농림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상업으로 성공한 공성학, 하지만 그는 김택영에게 한학을 배워 시문서화에 능통하였던 전통 지식인의 면모도 갖고 있었다.
경학원 부제학을 역임하기도 했고, 일본 유학의 성지 유시마 성당을 찾아가 그쪽 학자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오히려 그의 이른바 '친일' 행적은 이쪽에서 더 드러나는 듯도 하다.
공자의 후손이지만 상인이라는 것이 일종의 자격지심이었을까?
아니면 전근대와 근대에 걸친 경계인으로서 어느 한 쪽도 차마 포기할 수 없던 것일까.
아까도 말했듯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
1930년대 개성부립박물관이 건립되자 친히 그 편액을 썼을 정도로 글씨에 자신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남한에도 그리 드물지는 않다고 한다.
여기 소개하는 이 작품은 그가 일본에 갔을 때 사토라는 일본인에게 써준 것인데, 획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적다.
받는 사람을 적은 쌍낙관이 좀 크다 싶지만 전체적인 글의 균형도 잡혀있고 나름 격도 있다(인상비평 정도밖에 못하는 것을 양해해주셨으면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아마도 그의 처세철학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토 대인께서는 우아하게 감상하소서.
세상에 처함에 반드시 공을 맞이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 잘못이 없으면 그것이 공이로다.
남들과 더불어 덕에 느꺼워하기를 구하지 않으니, 악이 없으면 그것이 덕이니라.
춘포 공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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