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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개신교회를 더 닮은 한국 초기 가톨릭

by 초야잠필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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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될 때의 상황을 파고 들면 이 주제가 범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매우 무거운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가 처음 만들어지던 때의 상황을 보면 독특한 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1783년(정조 7년) 황인점(黃仁點)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13] 이 소식을 접한 이벽이 이승훈을 찾아와서 사절단에 동행하여 천주학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10] 이승훈이 승낙하자 이벽은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들과 함께 여비를 모아 주며[14]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필 것 등 여러가지를 상세히 일러주었다.[15]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을 찾아가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는데, 신묘하고 오묘한 가르침에 끌렸고 결국 자진하여 세례 받기를 청하였다.[17]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2]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8]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와했다.[17][19] 선교사가 가서 찾아보지도 않은 미교화국의 젊은 청년이 자진하여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3] 

선교가 아닌 구도(求道)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각종 과학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이승훈은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후 이벽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전교활동을 벌였다.

이벽은 전교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는데, 먼저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설득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한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지황 등이 그들이었다.

이벽의 전도로 천주교 교인이 된 권일신은 중인이던 천안 출신 이단원, 충청도 아산 출신 이존창, 전주 출신의 유항검을 입교시켰다.

이들은 출신지역을 전교하여 훗날 조선 천주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이바지했다.[20]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으로 옮긴후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을 오늘날 천주교 연구가들은 '명례방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으며[21] 아울러 이 신앙공동체 모임을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22][23][24] 

비밀리에 운영되던 모임은 이듬해 3월에 형조 포졸에게 적발되어 모임 참석자 전원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25] 

그러나 모임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만 투옥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훈방되었다.[25]


1786년, 이승훈은 은밀히 회심하였고 다시 복교한 이들과 조직 재건에 힘썼다.[34]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35][36]


흥미로운 부분은 이것이다. 

이승훈은 사신을 따라 북경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전교를 하여 신자를 늘리고 자신이 주교가 되어 신부도 임명하여 교회를 운영한다. 

가톨릭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이승훈이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이는 소위 말하는 사도전승 apostlic succession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곧 사도전승 없는 교회업무를 중단하고 신부 파견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반대로 이는 신부도 파견하지 않았는데 불모의 땅에서 교회가 자생한 기적 같은 일이라 자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유심히 보면 이승훈과 당시 조선의 "교회신자"들이 인식한 교회는

신부 파견도 없이 이루어진 기적 같은 사건이 아니라

이들이 처음 만든 교회는 사도전승에 충실한 가톨릭교리보다 이의 대척점에 선 개신교적 교회의 구조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최초의 기독교도인 이승훈과 그의 동료들이 이해한 교회란 천주교회가 아니라 개신교회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이승훈과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고도의 성리철학에 익숙한 사람들로 전래된 종교서적을 독파하여 내린 결론이 기존의 성리철학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내린 결론이 천주교적인 것보다는 개신교적인 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개신교적 교회를 세웠던 것일까?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과 동료들이 천주교 책을 읽고 사도 전승 없이 주교와 신부를 두어 시작했던 최초의 한국교회. 사도전승과 로마교회의 수장권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톨릭보다는 개신교회의 형태를 더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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