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5대 황제 경종景宗은 정비 예지황후한테서 딸 셋을 두고 개중 둘이 소배압-소항덕(소손녕) 형제한테 하가했다는 말을 했지만, 걸물이 첩실 발해비潑海妃한테서 둔 야율숙가耶律淑哥라는 공주다. 그 어미는 발해비라 했으니, 발해를 평정하고서 그에서 혹은 그 후손에서 맞이했을 것이니 발해 왕성으로 대조영 후손인 대씨大氏일 것이다.
이 숙가 공주는 아무래도 첩실 자식이라 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사 공주표公主表에서는 봉호封號가 따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위세는 대단해서 남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바꿔버린 케이스다.
이 공주표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야율현耶律賢, 곧 경종이 재위 12년째를 맞은 건형乾亨 2년, 서기 980년, 북한北漢에서 귀부한 노준盧俊이라는 사람한테 시집갔다.
이에서도 정실 자식인가 아닌가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거니와, 정식 공주라면 틀림없이 소씨蕭氏 집안에 하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첩실 자식이라 해서, 조선시대 관념으로는 공주가 아닌 옹주인 까닭에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노준盧俊은 생몰년을 알 수 없는 오대五代시대 북한北漢 사람이다. 북한 왕조 영무제英武帝 유계원劉繼元 광운廣運 3년, 서기 976년, 한漢 왕조가 송나라 압박을 받자 노준은 요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한다. 나라가 망하자 거란에 의탁한다.
그러고선 건형乾亨 원년(979),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에 제수되고 그 이듬해에 야율숙가耶律淑哥란 혼인함으로써 부마도위가 된다.
하지만 3년 만인 성종聖宗 통화統和 원년(983), 둘은 이혼에 이르고 만다.
요사 공주표에서는 공주가 부마도위駙馬都尉 노준盧俊과는 화해하지 못해 이혼하겠다고 표문을 올리고니 (황제가 허락하여) 소신노蕭神奴한테 다시 시집갔다고 했다.
한 번 떨어진 정이 다시 붙을 리는 없고, 애매해진 쪽은 노준이다. 그대로 중앙 관직에 머물며 서울 생활을 하면 부닥칠 일이 곤혹스럽다. 그래서 외방으로 보내 버린다.
공주한테서 이혼 당한(그 자신도 원했을지도 모른다) 노준은 훙국군절도사興國軍節度使라는 외직으로 나가서 그곳 임지에서 깨끗이 죽어버린다.
이혼하겠다고 표문을 올린 시점을 요사 본기에서는 통화統和 원년 6월이라 하며 소신노한테 개가한 시점은 그해 10월이라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득달 같이 이혼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새 남자 품에 안긴다.
공주표에서는 숙가를 경종의 넷째 딸이라 적기했지만, 그녀가 출가한 시점이 980년이요, 아버지 경종이 정비 소탁蕭綽과의 사이에 첫 아이를 낳은 시점이 970년이니, 숙가는 경종의 첫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첩실 자식이라 해서 홀시됐을 뿐이다.
숙가는 진짜로 노준과 사이가 안 좋았을까? 그럴 가능성이 물론 많겠지만, 그 첫 남편이 소씨가 아닌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댕카당 이혼하고서는 즉각 새로 찾은 남편이 소씨 가문 인물이라는 점을 보면, 왜 숙가가 노준과 불화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쓰불 나는 첩실 자식이라 해서 엄한 놈한테 시집보내고, 저 동생들은 정실 자식이라 해서 소씨 가문에 보내네? 열받은 야율숙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야율숙가 #남편바꿔치기 #거란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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