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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란의 치맛바람] (9) 공주들이 설치는 왕조

by taeshik.kim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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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 중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나는 거란 벽화 한 장면


앞선 시기에 나온 정사류를 찾아봐야겠지만 공주표公主表라 해서, 표 형식으로 각 황제별 공주 행적을 정리한 첫 정사가 아마 요사遼史 아닌가 싶거니와

그 권65 표表 제3이 공주표公主表거니와, 이에는 태조 야율아보기 이래 소회태자昭懷太子에 이르기까지 각 황제(일부 태자 포함)가 어떤 공주를 두었고, 그 어머니는 누구이며,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봉작을 받았으며, 누구한테 하가下嫁해서 그와 관련한 사적은 무엇이고 혹 죄를 지었다면 어떤 내용이며, 사망 관련 정보와 그가 둔 자식은 누구인지를 일목요연 표로써 정리했다. 

이 표를 만드는 이유를 요사 편찬자들은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거니와, 이는 거란 사회를 엿보는 하나의 독특한 시선을 제공한다 하겠다. 

춘추의 법[春秋之法]에는 왕의 딸[왕희王姬]의 하가下嫁를 서책에 적었으니 이는 노나라 군주[노공魯公]과 같은 성인 나라를 혼주婚主로 삼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부인이 문밖을 나서는 일을 꺼렸고 (그리하여) 집안 이야기가 문지방[梱]을 넘지 않았으니 (그런 까닭에) 공주公主는 모두 열전에 싣는 일을 예禮에 맞지 않는다 여겼다. 하지만 요국遼國은 나랏일을 오롯이 외척外戚에 위임한 까닭에 공주公主가 본기라든가 열전에 자주 보이니 그들을 표로 나타내 보일 수밖에 없다. 예禮에 이르기를 남자와 여자는 크기가 다르다고 했으니 황자皇子와 같은 반열에 둘 수는 없어 따로 공주公主를 표表로 만들어 첨부한다. 

春秋之法,王姬下嫁書於策,以魯公同姓之國為之婚主故爾。古者,婦諱不出門,內言不出梱。公主悉列於傳,非禮也。然遼國專任外戚,公主多見紀、傳間,不得不表見之。禮,男女異長,不當與皇子同列,別為公主附表。

저에서 말하는 왕희王姬란 왕의 희姬라는 뜻으로 왕의 딸들을 지칭한다. 춘추가 다루는 시대 종주국은 周 왕실이고, 그 주 왕실은 姬씨를 성씨로 삼았으므로, 곧 왕희란 왕의 성씨 희씨를 물려받은 여인네, 곧 공주를 말한다. 



월국공주 부부묘



주 왕실은 은상殷商을 멸하고는 중앙에 그 종실을 두고서 주변은 봉건제후들을 두어 전국을 다스렸으니, 이 봉건제후들은 주 왕실과 동성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른바 이성제후異姓諸侯도 없지 않아, 

문왕 둘째아들인 주공周公 단旦이 봉해진 지금의 산동 태산 일대 노魯나라가 전자의 대표라면, 그 동쪽 산동지방 척박한 땅을 받은 제齊나라는 문왕과 무왕의 왕사王師인 태공太公 망望이 봉함을 받은 곳이다. 

저 공주표 서문에서는 거란이 외척外戚 입김이 세다 했지만, 우리가 아는 외척이란 보통은 왕이나 태자의 집안이라, 공주와 그가 하가한 집안을 지칭하는 일과는 다른 듯해서 조금은 착란이 있지 않나 한다. 

다만 거란의 경우, 공주가 하가한 집안이 예외없이 소씨蕭氏이며, 그런 소씨 집안에서 다시 황후를 대대로 배출한다는 점에서 결국 이 황비를 배출하면서 황제의 공주들이 하가하는 蕭氏는 그 자체가 외척이 된다는 점에서는 하등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공주와 결혼한 소씨 집안 남자는 예외 없이 부마도위駙馬都尉로 봉해진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종 핵심 권력기구를 장악하는데, 이런 독점 시스템이 결국은 요나라 성장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제국이 확대하면서 무엇보다 인력수급에서 적지 않은 애로를 노출하기 마련이다. 

이 불만이 특히 한족漢族 출신자들한테서 나오기 마련인데,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한족 출신 관료는 멍석말이가 되고 만 일도 있다. 

왕의 국구國舅, 곧 장인이라든가 왕의 사위가 각종 권력을 독점하면서 실제 행정까지 장악한 이 시스템은 이런 체제를 부패로 막으려 한 조선시대와 뚜렷이 다르다. 물론 조선시대라 해서 국구나 왕의 사위가 권력을 전단하기도 했지만, 특히 부마의 경우 아예 관직 진출 자체를 법으로 금지하는 제도 자체를 시행했으니 말이다. 

공주 또한 하가해서도 적지 않은 정계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한다. 그런 까닭에 요사 편찬자들은 할 수 없이 공주 일람표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거란의 치맛바람을 증언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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