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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란의 치맛바람] (4) 성종의 황후를 핍박해 죽인 검은 후궁(2)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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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른 정? 낳은 정?

 
그렇담 성종聖宗의 정식 부인이 아니면서도 참람하게 후궁에서 일약 황태후로, 그것도 성종의 죽음과 더불어 그렇게 진급한 흠애황후欽哀皇后 소누근蕭耨斤은 누구이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요사遼史 권63 열전 제1 후비后妃 전에 그를 일러 “어릴 적 이름이 누근耨斤이며 순흠황후淳欽皇后 동생인 소아고지蕭阿古只의 5세손이다”고 했으니, 예서 순흠황후(879~953)란 거란 태조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황후를 말한다.

아무리 후궁이라 해도 근본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 동생의 5세손이라 한 대목은 한참이나 왕비를 배출하는 소씨 가문에서도 한미한 계통이 아닌가 한다. 요사 다른 데를 보면 그의 아버지는 소요괴蕭陶瑰 혹은 소해리蕭諧里라 하며, 한식漢式으로는 소화蕭和라 했다 한다. 

열전에서는 그를 일컬어 “유면黝面에 낭시狠視”라 했는데, 묘사가 참 고약하다. 유黝란 말을 설문해자에서는 미청청흑微靑黑色이라 했으니, 푸른 빛을 약간 띠는 검은 색이라는 뜻이다.

옥편玉篇에서는 아예 黑也라 해서 검은 색으로 보았으며 이아爾雅 석기釋器 편에서도 黑謂之黝라 해서 검은 색을 黝라 한다 했다.

이로써 보면 얼굴빛이 검었다는 뜻이거니와 좀 약하게 봐서 까무잡잡하다는 뜻이다. 
 

엄마라는 존재

 
낭시狠視는 글자 그대로는 낭의 눈빛이라는 뜻이니, 이리나 승냥이 같은 표독스런 눈빛이라는 뜻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의 행적이 좋지 않은 데 따른 악의적인 기술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있다.

실제로 까무잡잡했겠지만, 저런 몰골의 여인을 황제가 후궁으로 들이고, 더구나 들여서 아이까지 임신하게 할 정도라고는 보기 힘든 까닭이다. 

그의 기이한 행적으로 열전은 두 가지를 들었으니 첫째 어릴 적에 그의 엄마가 꿈에 하늘을 떠받친 황금 기둥을 여러 아이가 오르려다가 실패했지만 그만이 몸종들과 함께 모두 오르는 꿈을 꾸어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오르지 못하는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하나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고 난 다음에 있었던 일이니, 그가 한 번은 승천태후承天太后 평상에서 금계金雞를  집어 삼켰더니 피부색이 광택이 나서 평소와는 달라지니 태후가 놀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한 아들을 낳겠구나 했다고 한다.

아마 태후 의자 혹은 평상이 당시에는 금계를 장식한 모양이라, 그걸 집어 삼켰다는 뜻 아닌가 한다. 

이 기술로 보아 저 앞에서 말한 거무틱틱 표독스런 외모와는 달리 실제는 꽤 미모를 자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간다. 

그런 그에게 축복은 황자를 낳았다는 데 있었다. 더구나 정식 황후인 인덕황후仁德皇后가 일찍이 아들 둘을 낳았지만 일찍이 요절하는 바람에 맏아들을 낳았으니, 특별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인덕황후로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누근이 낳은 이 아들, 곧 훗날 성종을 뒤이어 보위를 잇게 되는 흥종興宗을 자기 아들처럼 여겨서 키웠다.

흥종 또한 그런 기른 정이 고맙기 짝이 없었는지 이후 행적을 보면 무척이나 인덕황후를 따른 듯하다. 
 

전사?

 
이런 두 여인 처지는 성종이 죽으면서 일변하게 된다. 성종이 붕崩하자 앞서 본대로 내가 새로운 황제 생모임을 내세워 인덕황후를 핍박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린 황제를 대신할 섭정을 그 자신이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를 위해 성종이 병들자, 혹은 그 이전부터 소누근은 치밀히 준비한 듯한데, 호위護衛인 풍가노馮家奴와 희손喜孫 등 심복들을 시켜 인덕황후를 무고하기를 황후가 북부재상北府宰相 소착복蕭浞卜과 국구國舅 소필적蕭匹敵 등과 더불어 반역을 꾀한다고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담당 부서에 조사케 하니, 이미 그가 권력을 장악한 조사기관은 황후가 관련됐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하지만 어린 새 황제 흥종은  “황후皇后께선 선제先帝를 모신지 40년이고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길러 주셨으며 당연히 태후가 되셔야 하지만 지금 그러지 못하고 도리어 죄를 주어야 한다니 가능키나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생모 흠애欽哀는 버럭하면서 “이런 사람이 계속 있다면 장차 후환이 될까 두렵다”고 했거니와,

그런 말에 어린 황제는 “황후皇后께서는 자식도 없고 늙으셨으니 비록 그 자리 계신다한들 무슨 대수이겠습니까”라고 했지만. 흠애는 듣지도 않고 황후를 상경上京으로 강제로 옮기게 하니, 실상 유폐다. 

하지만 이걸로 안심할 수 없다 해서 황제가 봄 사냥을 나가고 황궁을 비운 틈을 이용해 기어이 사람을 보내 황후를 죽이고 마니, 이 대목 기술이 자못 비장하다. 

흠애欽哀는 황제가 길러준 은혜를 잊지 못하며 그리워할 것을 염려해 사람을 보내 해코지(죽이고자) 했다. 사자가 이르자 황후가 말하기를 “내가 무고함은 진실로 천하가 다 안다. 경들은 내가 목욕재계하기를 기다려서 나를 죽여주시오, 괜찮겠소?”라고 하니 사자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물러났다가 나중에 돌아가 보니 황후는 이미 붕崩했으니 향년 50세다.

이렇게 황태후가 될 사람을 처단하고서는 스스로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섭정攝政하고 그 자신의 생일은 응성절應聖節이라 해서 매년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엄마

 
하지만 이런 소누진, 곧 흠애태후도 말년은 좋지 않았다. 중희重熙 3년(1034)는 아마 흥종이 친정을 개시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데, 이때 태후가 몰래 동생들을 불러서 막내아들 야율중원耶律重元을 황제에 앉히기로 하고 모의했다. 

이런 사실은 다름 아닌 야율중원이 황제한테 밀고하게 되는데, 왜 자기 아들을 내몰고 다른 아들을 세우고자 했을까? 나는 아들이 고분고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자신을 길러준 인덕황후를 그리 죽음으로 내몬 일을 황제가 쉽사리 용납할 수 없었다고 본다. 이것이 두고두고 부담이 소누진은 부담이 되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이런 역적 모의가 발각되자, 흥종은 엄마가 쓴 태후太后라는 직책을 회구해 버리고 경주慶州 칠괄궁七括宮으로 옮겨 살게 한다. 이는 실상 엄마를 유폐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중희 6년(1037) 가을에 황제도 이제는 시간도 지나고 또 엄마이니 어쩔 수 없다 해서인지, 무엇보다 이 정도는 됐다 싶어 다시 엄마를 맞아들고 정성을 다해 모셨지만 흠애는 기쁜 표정이 없었으니, 그 자신으로는 억울해서였지 않겠는가?

다름 아닌 아들놈한테 유폐까지 됐었으니 그 마음이 풀리기는 하겠는가?

하긴 뭐 태후로 복권되었다 한들 이미 시대는 바뀌어 꿔다논 보릿자루 신세밖에 더 되었겠는가? 열라리 억울하기는 했을 것이다. 

이 무서운 엄마 소누근은 아들 흥종보다 오래 살았다. 얼마나 아들한테 원한이 사무쳤던지 아들이자 황제가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표정 하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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