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요遼나라 제7대 황제 흥종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은 조강지처가 애초 황후가 앞서 본 인의황후仁懿皇后 소달리蕭撻里가 아니라 따로 있었다. 소달리는 흥종이 즉위하면서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아들을 낳아서 황후가 됐다.
황후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본래 그 자리 주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가 부마도위 駙馬都尉 소필리蕭匹里 딸 소삼천蕭三蒨이었다.
생몰년을 알 수 없는 소삼천은 태평太平 8년, 1028년, 11월 야율종진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태자비太子妃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삼천의 엄마다. 그 엄마는 성종聖宗의 장녀 야율연가耶律燕哥다. 이 공주가 소필리한테 하가下嫁해서 낳은 딸이 나중에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었으니, 족내혼을 금지하고 족외혼을 규정한 사회가 실제로는 얼마나 눈가리고아옹인지를 이 경우도 여실히 확인한다.
실제는 근친혼이었다. 이런 근친혼 사회가 족내혼을 피하고 족외혼을 선택하는 방식이 바로 이랬다.
요사遼史 권 제17卷 본기本紀 제17에 이르기를 태평 8년 “11월 병신일丙申日에 황태자皇太子 소씨蕭氏를 비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1031년, 남편 야율종진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자 자동으로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중희重熙 초년에 죄를 지어 귀비貴妃로 강등되었다. 귀비는 후궁 등급 중 하나니 황후에서 후궁이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한데 이 중요한 사건이 본기에서는 전연 논급이 없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언급이 없다.
요사遼史 권67 열전 제1 후비后妃에도 “황제(흥종)이 즉위한 후에 황후로 세워졌다가 중희重熙 초初에 죄를 지어 귀비로 강등됐다”는 기술이 전부다.
중희重熙 초初라는 시점도 문제인데 중희重熙는 1032년 11월 이래 1055년 8월까지 사용한 연호라, 그 초반기 어느 시점을 말할 뿐,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도 없다.
중희 초기라면 흥종 생모인 흠애황후欽哀皇后 소누근蕭耨斤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며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할 때라, 그가 성종聖宗의 정비로 황후 시절에는 제천황후齊天皇后로 일컬었다가 훗날 인덕황후仁德皇后로 일컬은 소보살가蕭菩薩哥를 협박하여 황태후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상경上京으로 몰아내고 유폐한 다음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이 시점에 소삼천蕭三蒨도 황후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 예사롭지 않다.
틀림없이 소삼천 또한 인덕황후 일당이라 해서 소누근한테 쫓겨났을 것이다. 소삼천은 아마도 인덕황후가 입김을 넣어 흥종이 황자 태자 시절 그 태자비로 들이는 데 관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누근은 어린 황제 아들 흥종의 조강지처를 내친 다음, 그의 조카인 소달리蕭撻里를 새로운 황후로 들인 것이다.
이 소누근이라는 여인, 볼수록 한 고조 유방의 마누라 여태후를 연상케 한다.
아무튼 귀비로 강등된 이후 옛 황후 소삼천은 이렇다 할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영영 재기하지 못하고 잊힌 존재가 되어 사라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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