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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치맛바람] (5) 물러터진 아들을 대신해 반란군을 직접 토벌하는 소달리蕭撻里

by taeshik.kim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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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제7대 황제는 묘호廟號가 흥종興宗이니, 당연히 성씨는 야율耶律이며 이름은 종진宗眞이다. 1016년 4월 3일, 성종聖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031년 6월 25일, 아버지가 죽자 16세에 제위에 올라 1055년 8월 28일까지 24년을 재위하고는 향년 40세로 갔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새로운 연호를 만드는 전통에 따라 그 역시 즉위 직후 잠깐 경복景福이라는 연호를 쓰다가 이듬해 버려 버리고 중희重熙 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세워 죽을 때까지 썼다. 

거란 이름은 지골只骨. 엄마는 앞서 봤듯이 문제 많은 야심가이자 책략가 음모가인 소누근蕭耨斤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당연히 초반기 실권은 엄마한테 갔지만, 만 18세가 된 중희 3년, 1034년 7월, 다름 아닌 엄마가 자신을 몰아내고 동생 야율중원耶律重元을 새로운 황제로 세워 꼭두각시로 삼으려 하자 엄마를 몰아내 유폐하고는 그 일당을 처벌하고서는 친정을 개시했다. 

거란은 성종 시대를 만나 극성을 구가했으니, 이는 곧 쇠퇴의 시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흥종의 시대를 어찌 봐야 하는지 이 논점이 적용되어야 하니, 그래도 흥종 시대는 볼 만했으니 북송을 더욱 압박하고, 서쪽에서 부상하는 서하西夏 또한 일단 짓누르는 데는 성공했다. 
 

소달리 역시 여전사였다. 물러터진 아들을 대신해 진압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직접 토벌했다.



그의 정비는 소달리蕭撻里다.

그를 일컬어 요사遼史 권63 열전 제1 후비后妃에서는 시호를 인의황후仁懿皇后蕭氏라 하며, 어릴 적 이름은 달리撻里이니, 흠애황후 동생인 소목蕭穆의 장녀라 했다.

소목은 다른 데를 보면 이름이 효목孝穆이라, 효도를 다하고 화목을 꾀한다 해서 부친 이름이라, 흠애황후欽哀皇后 소누근과 더불어 소화蕭和라는 사람 자식이다.

그 조상을 거슬로 올라가면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시대 그의 황후인 순흠황후淳欽皇后 술근평述律平의 동생 소아고지蕭阿古只로 닿는다는데, 이 정도도 족보면, 그냥 그런갑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거란시대 황후 책봉 전통을 보면 시어머니, 곧 현재 황제의 어머니랑은 단순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아니라 실제 혈족으로 보면 고모-조카 관계를 보이는 일이 제법 있으니, 소달고 역시 그러해서 시어머니 소누근이 아버지의 누나이니 고모였다. 

이는 족내혼을 금지하고, 반드시 부인은 그 바깥 부족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족외혼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중국 역시 이런 모습을 왕조에 따라 짙게 보이기도 한다.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성씨가 같은가 다른가를 족외혼 표식으로 삼는 것인데, 이게 눈가리고아옹이라 실제 내막을 들여다 보면 극심한 근친혼으로 얽혀있다. 

소달고에 대한 요사 평가는 아주 후하다. 성격이 관예寬睿하다 했으니 관대해서 베풀기를 좋아하고 머리까지 갖추었다 하니 말이다. 또한 자태는 단려端麗하다 했으니, 단아하고 고왔다는 뜻이다.

흥종이 즉위하고 고모 소누근이 집권하자 입궁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훗날 도종道宗이라 일컫는 후임 황제라, 보위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니 중희 4년, 1035년에 이르러 마침내 황후가 된다.

한데 이 대목을 보면서 의문이 있다. 소달리가 황후가 된 시점이 저때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다른 정식 황후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이른바 조강지처인 셈인데, 그렇다면 조강지처는 어찌되었기에 후궁인 소달리가 황후로 승진했던가? 이 의문은 별도 자리를 마련해 보기로 한다.
 

드루와! 저 이미지에 소달고를 덧씌우면 된다.



소달리의 과단성은 황제의 엄마로서 빛났다. 

아들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가 즉위하면서 당연히 황태후皇太后가 된 그는 청녕淸寧 9년, 1063년 가을, 돈목궁사敦睦宫使 야율량耶律良을 통해 고변 내용을 하나 접수한다.

이르기를 황태숙皇太叔 야율중원耶律重元과 그의 아들 야율날로고耶律涅鲁古가 반란을 획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엄청난 내용을 야율량이 어찌해서 바로 황제한테 달려가지 않고 태후한테 달려가서 일러 바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황제가 믿지 않을 것을 염려했으며, 그 사이 정보가 새어나가면 반격을 받을 우려가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거니와,

나아가 그의 직책이 돈목궁敦睦宫 관리를 책임지는 직책에 있었으니, 돈목궁은 아마도 태후가 거처하는 곳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있으니 그렇다면 야율량은 그 주인한테 먼저 이른 셈이 된다. 

모반 주체라는 황태숙 야율중원耶律重元이 누구인가? 황태숙皇太叔은 말할 것도 없이 황제의 삼촌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그 황태숙은 황자 시절에 자기 엄마 소누근이 자기를 옹립하려 한다는 고변을 함으로써 모반을 알려 사전에 차단케 한 사람 아닌가?

그런 그가 훗날 정치 야심이 불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모반을 하려 한다?

도종이 쉽사리 믿지 못할 것임은 분명했다. 나는 야율중원이 아니라 내심 그의 아들 야율날로고耶律涅鲁古를 의심한다. 틀림없이 이 놈이 아버지를 부추겨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모반 계획을 접한 황태후 소달고는 즉각 아들 황제 도종한테 달려가니, 예상대로 도종은 쉽사리 믿을 수 없다 하면서 고변 내용을 의심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소달고는 “이는 사직社稷이 걸린 대사大事이니 의당 조속히 대비해야 한다” 하니 그제야 도종이 마지 못했는지 아무튼 계엄戒嚴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양측은 내전에 돌입했다.

이때 황태후는 물러터진 아들을 못믿겠다 생각했음인지 직접 군사들을 독려하고는 모반자들을 일망타진한다. 

소달리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강大康 2년, 1076년 3월 11일 신유辛酉에 붕서한다.

시어머니이자 큰고모 소누근과는 달리 그는 인자함을 갖춘 왕비였고 왕모였다.

매년 정월 첫날이나 그의 생일에 제후들이 바치는 세폐는 모조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썼다.

또 그가 모반한다 해서 죽인 중원重元이 꿈에 나타나 “신의 뼈가 태자산 북쪽에 있어 추위를 이길 수 없습니다 ” 라고 하니, 곧바로 제대로 묻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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