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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명필 소암 현중화(1907-1997) 선생이 칠순을 넘긴 80년대 이후의 어느 날, 거하게 약주를 하셨다.
이 어른은 약주-주로 꼬냑을 즐겨 자셨다고-를 어지간히 하셔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이 글씨를 쓰셨는데, 그날도 흥이 일었는지 지필묵을 찾으셨나보다.
그런데 하필 갈아놓은 먹이 좀 묽었던지, 첫획이 퍽 두껍고 연하게 나왔다.
다행히 글씨가 마구 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붓이 오래 종이에 머무르면 먹물이 퍼지게 마련인 법.
소암 선생은 제법 빠르게 '포금간학거抱琴看鶴去' 다섯 글자를 예서로 종이 위에 옮겨놓았다.
종이가 살짝 비틀어졌는지 글자가 왼쪽으로 주루룩 올라가서 두루미 '학'자가 가장 높아졌다.
종이를 뚫고 학이 날아갈까 걱정하셨을까.
살짝 위치를 낮추어 갈 '거'자를 휙휙 긋고, 그 여세를 몰아 '서귀소옹'이라고 낙관을 썼다.
둥글둥글한 분위기가 평소 소암의 작품에서보다 더한 본문과 달리 낙관은 더욱 거칠게, 괭이로 무른 땅을 파제끼듯 팍팍 찍듯이 쓰셨다.
이 어른은 써 놓은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인장을 찍지 않았다는데, 취중에 쓰셨어도 나름 괜찮다고 여기셨는지 제 위치에 두인과 성명인, 아호인 한 세트를 꾹꾹 찍으셨다.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 된 것이다.
도록을 봐도 메마른 갈필로 쓰셔서 골기가 느껴지는 글씨는 적지 않지만 이렇게 두툼하고 물기 많은 작품은 드물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호방함이 바탕에 가득하고 또 획 속에 뼈대가 느껴져 소암 선생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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