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학관 아래엔 작은 집 한 채가 더부살이하듯 있다.
일부러 그쪽으로 좀 돌아서 내려가보니 '천안 장산리 석불입상'이라고 고려시대에 만든 돌부처시란다.
기둥모양 통돌을 깎아서 서 있는 부처를 만들었는데, 퍽 두꺼운 옷을 입으셔서인지 옷주름이 섬세하진 못하지만 제법 소박한 맛은 난다.
또 대좌에 '장명리 향도'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니, 고려시대 이 지역 백성들이 한데 모여 이 분을 새기고 세웠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보호각 앞 설명문을 보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풍만한 얼굴에 자비로움이 가득하고, 코는 무속적인 습속으로 훼손되었다."
라라나?
실제로 이분 코는 뭉그러진지 오래인지 시멘트로 때워져 있었다.
문제는 코뿐만 아니라 입과 눈에도 모두 시멘트가 베풀어졌는데 이 찬자께서 어떻게 이분 상호에 "자비로움이 가득"한지 아셨느냐는 사실이다.
지레짐작이라고 해도 문제고 원래 그랬다고 해도 문제다.
아까 봉선홍경사 갈기비보단 낫지만, 여기 불상의 보호각도 썩 '보호'라는 느낌을 주진 못한다.
을사늑약을 '보호조약'이라 부른다고 본질이 달라지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지나친 감상일는지.
어쨌건 이 분을 뵙고 다시 길가로 나와 약간 걷는다.
부슬부슬 겨울비 내리니 정취는 나름 있는데, 길을 걸으며 나오는 장산리 마을은 어쩐지 음산하다.
그 안개 속을 파고들며 몇 번 길을 꺾어드니 '홍대용 선생 생가지'란 안내판이 나오고, 그 안내를 따라가니 작은 언덕배기 아래 제법 너른 터가 나온다.
주춧돌 몇 기가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무엇보다 안내판 그리고 표석이 여기가 홍대용 선생 나신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마을에서도 꽤 안쪽에 자리하고 또 그 터의 규모나 주춧돌의 생김새를 보면, 담헌 당년에 그 집안이 어느 정도 위세였는지를 알 수 있지 싶다.
아 여기가 그 학자 담헌의 탯자리인가...감회에 젖다가도, 그가 꼭 불세출의 과학자요 실학의 대가라고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냥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얘기냐, 평소 존경하는 강명관 선생님의 칼럼 '호사스런 말 뒤에 있는 것'을 보면...
......
영천군수로 있던 그는 경상도 감영에 백성들을 구휼할 곡식 1천 석을 요청했다. 관찰사 이병모李秉模는 선선히 허락했다.
그는 5백 석을 실제 백성들의 구휼에 썼고 나머지 5백 석은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그런데 빌려준 5백 석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5백 석을 1천 석으로 부풀려 빌려주었던 것이다.
5백 석을 어떻게 배로 늘렸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요지는 간명했다. 2석을 갚는 조건으로 1석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 집에 다녀온 뒤 그가 빌려준 곡식을 받으려 하자 백성들은 완강히 버텼다. 1석만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와 백성들 사이에 불거진 갈등은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결국은 관찰사에게도 보고되었다. 고민 끝에 휴가를 얻어 다시 서울 집으로 갔다.
임지로 복귀하라는 정조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 병을 핑계 대며 영천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빌려준 곡식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이라 하였다.
희한하게도 그의 아버지 역시 나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환곡 2만 석을 가분加分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상도 예천군으로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가분은 규정된 수량을 초과하여 환곡을 대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춘궁기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빌려주는 환곡은 원래 이자가 없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출납 과정에서 곡식이 줄어드는 것을 구실로 ‘모곡耗穀’이란 이름의 이자를 받기 시작했다.
모곡은 이내 큰 문제가 된다. 지방관들은 규정을 넘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환곡을 강제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착복했던 것이다.
지방관들이 백성을 쥐어 짜 제 주머니를 불리는 방법이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게 집안의 내력이었던지 비슷한 일이 그의 숙부에게도 있었다.
그의 숙부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목화 농사가 3년 내리 흉작이었는데 경상도만은 수확할 것이 있었다.
관찰사는 즉각 다른 지방 상인들이 경상도로 들어와 목화를 사 가지고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 뒤 자기 돈으로 목화를 사들였다. 호남의 솜 값이 폭등했다.
정조는 충주부터 서울까지 장차 옷가지가 없어 추위에도 몸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라고 화를 내었다. 관찰사의 의도는 빤했다. 사들인 목화를 팔아 한몫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정조는 관찰사를 파직했다. 관찰사를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부자인데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다니, 그의 조카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는 누구인가? 홍대용洪大容이다.
그의 아버지는 홍역洪櫟, 숙부는 홍억洪檍이다.
홍대용 가문은 정통 노론의 본류로서 이름난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
20세기 이후 한국사회가 홍대용이란 이름 앞에 붙인 ‘지전설을 주장한 실학자’란 수식어를 벗겨내면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홍대용 가문의 실체가 드러난다.
위에서 예시한 관직을 수단으로 백성을 쥐어짜고자 했던 행각은 그 실체의 일부다.
오늘날 한국의 지배계급을 둘러싸고 있는 호사스런 말을 걷어내면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
최근 인사청문회를 본 소감이다.
........
낭만을 와장창 부수는 글이지만, 결국 '실학자' 홍대용도 조선의 지배층이었다는 이야기다.
고리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일이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마땅한 것이었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병을 얻을 지경이었다.
'그'에 '홍대용'이라는 이름을 넣자 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생가터에 남은 댓돌을 딛고 서서 장산리 마을을 휘이 둘러보고, 내려와 마당에서 왼쪽을 무심코 보니 홍대용과학관 건물이 보인다.
허상이 아닌 실제의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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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을 만나는 길 2-천안 홍대용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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