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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거부당한 희망퇴직, 출근거부투쟁으로 저항한 최항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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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그의 시대 개막과 더불어 그대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국정 방향은 무엇인가라는 성종의 물음에 응대한 최승로 시무 28조 중 일부는 성종이 채택했다. 

다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그 시무책 중에서도 오직 최승로의 그것만 남은 까닭에 그것이 새로운 국정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해서, 꼭 그것이 최승로만의 독창적인 발안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실 최승로가 지적한 국정방향이란 것들도 뜯어보면 새로운 내용은 없고 당시 이를 응대한 신하들이라면 누구가 지적했을 법한 것이 대부분인 까닭이다. 내가 보건대 한국역사학은 이를 혼동했다.   

개중에는 따라서 꼭 최승로만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 시무방진책에도 보였을 내용이 카니발 폐지 혹은 축소였다고 보이는데 이건 시대 흐름상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성종이 팔관회八關會를 폐지한 것이다. 이 팔관회는 태조 왕건의 유훈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잡기雜伎만 넘쳐난다는 비판이 고조되는 형국이라 성종은 축소도 아닌 폐지로 답한 것이다.

이 팔관은 순수 불교행사인 연등회에 견주어 도교 색채가 무척이나 강한 페스티벌이다. 물론 불교 색채도 강했다.

그걸 폐지하는 대신 성종은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분향한 후 구정毬庭으로 돌아와 문무관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사를 마쳤다. 
 



최항은 이 팔관회를 재개해야 한다고 요청해 관철한다. 최승로가 폐지해야 한다 주창한 그것을 도로 들고 나온 것이다.

불교에 심취하고 출세라는 출세는 다 맛본 최항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데 보통 70에 퇴직하지만 나이 오십 무렵에는 벌써 희망퇴직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희퇴 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최종 인사권자인 현종이 사인을 하지 않았다. 재주가 아까웠고 무엇보다 사부를 어찌 보낸단 말인가? 가오 문제도 컸다.

이를 그는 출근 거부 투쟁으로 저항했다.

할 수 없이 현종은 실권은 없고 고액연봉인 재상 자리를 맡겼다.

책임은 없고 고소득 연봉만 따박딱박 타가며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다 현종 15년(1024)에 죽으니 향년 쉰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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