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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Well-dying은 사찰에서, 서희 부자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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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부두르

 
요새는 죽음을 보통 병원에서 맞이하지만, 그 이전에는 집에서 죽었다. 불과 몇십년 전만 거슬러올라가도 그랬으니, 앞서 신동훈 박사께서 쓴 대로, 병원에 있다가도 집에서 죽어야 한다 해서 죽을 때가 되면 굳이 집으로 모셨다. 내 선친은 집에서 말년을 몇년 동안 누워계시다가 집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 만한 고역인지 모른다. 불효를 논하기 전에 이는 죽어가는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도 못할 짓이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 

악습이라 해야 할 이 전통이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것은 주자가례 도입이 결정적이었다. 더 정확히는 유교가 불교를 완전히 타도하고 절대 윤리로 군림하면서 이런 전통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불교가 국교이다시피한 고려시대에는 어땠을까? 

있는 집안에서는 보통 죽음을 사찰에서 맞이했다. 요양을 보통 사찰에서 했으니, 당시 사찰은 요양병원이기도 했고, 어쩌면 병원 기능도 아울러 수행했다.

죽음도 사찰에서 맞이했다. 그러니 그에 따른 제반 장례 절차도 사찰에서 맡아서 했다. 이것이 얼마나 편하겠으며 사찰은 사찰대로 이것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적지 않은 자금 지원을 받았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로 고려 전기 그 유명한 강동육주 획득으로 한국사에 그 이름을 길이 아로새긴 서희 부자가 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의하면, “(성종) 15년(996)에 서희徐熙가 병이 들어 개국사開國寺에 머무르자 성종이 직접 가서 문병하고, 어의御衣 1벌·말 3필을 사원에 나누어 시주하였다. 또 곡식 1,000석을 개국사에 시주하였고, 무릇 명운을 기도하기 위한 것으로 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이듬해 녹봉을 줄 때에 서희의 병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으므로, 왕은 담당 부서에 명하여 이르기를 ‘서희가 아직 사직할 나이가 되지는 않았으나, 질병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므로 치사록致仕祿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라고 했다. 

이로 보아 서희는 병이 들자 개경 개국사라는 사찰에서 요양했음을 본다. 하지만 이는 죽으러 간 데였다. 그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개국사에서만 3년 정도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서희가 목종穆宗 원년 998년에 향년 57세로 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는 베 1,000필,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다腦原茶 200각角, 대다大茶 10근, 전향栴香 300냥을 부의로 주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하니, 명확히 그 장례를 어디에서 주관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보나마나 개국사에서 했다. 

그의 아들 서눌徐訥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성종 15년(996) 과거 갑과甲科로 등제한 그는 여러 요직을 거치고 정종 7년(1041)에는 궤장几杖을 받았다 했으니, 이때 70살이 된 듯하다. 그런 그가 마침내 병들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지장사地藏寺로 들어가 요양하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만다. 

작금 불교를 지칭해 지나치게 기복 중심이라 비판하는 시각도 없지 않은 듯하지만, 불교가 수행한 사회적 역할을 생각보다 더 컸고 더 다양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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