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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거북? 자라? 장식 부산 복천동고분 출토 그릇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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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간 거리 표시한 18세기 함경도 지도, 보물된다

송고시간 | 2019-12-31 09:56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금동불·부산 복천동 고분 토기도 지정 예고



복천동 11호분 기대와 항아리 노출 모습



문화재청이 보물 지정을 예고했다고 31일 발표한 것 중에는 ‘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釜山福泉洞 十一號墳出土陶器龜裝飾圓筒形器臺및短頸壺]’가 있으니, 이를 지정예고하면서 문화재청은 일컫기를 


가야 시대 고분 중에서 도굴 당하지 않은 복천동 11호분의 석실 서남쪽에서 출토되어 출토지가 명확하고 5세기 가야 시대 무덤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야 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서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어 보존상태가 우수하고, 기대 중앙 부분에는 거북이 토우 한 마리를 부착시켰는데 삼국 시대 토우 중 거북이 토우가 붙어있는 유일한 사례다. 


라고 소개했거니와, 이를 가야시대고분으로 명시한 대목은 내가 지워버렸다. 이 무렵 복천동고분군을 운영한 정치에 대해서는 금관가야인가 신라인가 논란이 많은 점도 내가 고려했다. 


문제의 복천동 11호분은 1980~1981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삼국시대 석실분이다. 이를 조사단은 5세기경 부산에 있었던 가야 세력 수장급 인물을 묻은 무덤으로 간주했다고 기억하거니와, 암튼 이 무덤은 같은 복천동고분군 제10호분과 함께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을 이루는 대형 고분이다. 


11호분 출토 그릇받침대와 항아리



개중 11호분은 미도굴 상태로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크다. 


보물지정이 예고된 기대와 항아리에 대해 문화재청은 "규모가 크고 형태가 조화롭고 안정적인 점, 기대 표면이 자연스럽게 시유施釉된 점, 11단을 나누어 단계별로 다양한 종류의 투창透窓을 뚫고 지그재그로 문양을 새겨 넣은 점 등 여러 면에서 가야 토기 제작의 높은 기술적 성과를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덧붙여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형태와 거북이의 조형성, 안정된 조형 감각과 세련된 문양 표현 등으로 볼 때,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도기로 꼽을 수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할 충분한 학술․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고도 했다. 


이번 지정예고가 말할 것도 없이 가야사 복원 움직임과 맞물렸거니와, 한국 문화재정책의 고질이 이번에도 드러난다. 나는 이런 지정 방식 반대한다. 복천동고분군 출토 유물 일괄을 지정하는 이런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 언제까지 곳감 빼먹듯이 개중 보기 좋은 것만 쏙 빼서 이것이 보물이요 나머지는 우수마발이다 하겠는가? 




참고 삼아 한국고고학사전에서 문제의 복천동 11호분을 뽑아본다. 김두철이 작성한 이 기술은 사전이 아니다. 난수표다. 


복천동10·11호분(釜山福泉洞10·11號墳)


설명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 일대에 위치한다. 이 고분은 수혈식석곽인 주곽(11호)과 목곽인 부곽(10호)이 70㎝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배치된 고분이다. 복천동고분군의 주·부곽을 갖춘 대형분 중에서는 8·9호분과 함께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고분군 내의 수장급 무덤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차적으로 조영되어 간 것을 고려하면, 가장 마지막 단계에 수장권을 계승한 무덤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도굴의 피해를 입은 8·9호분이 능선 정상부에 위치한데 반해, 10·11호분은 서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기는 하나 서로 근접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서 묘광 등 규모 면에서는 10·11호분이 더 크다. 이 고분의 북쪽과 남쪽에는 후대의 단독 석곽인 7호분과 15호분이 조영되어 있다.


주곽의 묘광은 길이 750㎝, 너비 450㎝, 깊이 220~320㎝이다. 매장주체인 석곽은 지하식이며, 길이 430㎝, 너비 150㎝, 깊이 150㎝이다. 장벽의 한쪽 중앙부에서 석축을 시작하여 다른 쪽 중앙에서 마무리되었는데, 크기와 형태가 비슷한 할석을 이용해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며, 틈새는 작은 할석을 끼워 보강하고 진흙을 발라 마무리하였다. 주로 옆으로 뉘어 쌓았으며 측벽과 묘광 사이의 공간에도 동시에 돌을 채워 쌓았다. 측벽의 상부에는 대형 개석 4매를 덮고 그 사이사이의 틈새를 할석으로 메우고 점토로 보강하였다. 부곽의 묘광은 길이 600㎝, 너비 350㎝, 깊이 150~200㎝이며, 내부에 목곽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주곽의 바닥에는 양 단벽 쪽을 일부 비워 두고 할석을 깔아 시상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남쪽으로 치우쳐 주인공이 매장된 위치에는 대개 9~10개를 한 묶음(束)으로 한 철정 8묶음을 2~3단에 걸쳐 서너 줄 깔아 구별하였다. 철정은 관 아래에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철정 위의 피장자 오른쪽에 삼루·삼엽·소환두대도가 각 한 점씩 3점이, 왼쪽에는 목병대도 1점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피장자가 착용하였던 금제 세환이식이 한 쌍(雙)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피장자의 두향은 남침으로 추정된다. 환두대도의 병부 쪽 외측에서는 금동관이 한 점 출토되었는데, 착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외에도 시상석이 깔리지 않은 동쪽 모서리에 장축을 따라 누워 있는 1구를 포함하여 피장자의 발치 쪽에서 모두 3인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거북이라 했지만, 거북인지 자라인지 알 수 없다.



주곽의 주 부장공간은 시상석이 깔리지 않은 양쪽 단벽 쪽에 마련되었다. 발치 쪽에는 고배류가 중심인데, 여기에는 패각이나 새 뼈 등이 담겨 있어 실제 매장의례 시에 음식을 담아 공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머리맡에는 원저단경호와 조합된 구형토우부(龜形土偶附)통형기대, ‘S’자로 만곡한 종장판투구·경갑(頸甲)·경갑(脛甲)이 찰갑한 벌과 함께 일괄로 출토되었다. 주인공과 관련되는 유물들로서, 부곽에 부장된 판갑이나 고배형기대와는 취급에서 차별되는 유물들이다. 그 외 철도자·철사·유자이기 등이 함께 부장되었다. 이밖에 철모나 꺾쇠들이 곽의 주변을 돌아가며 출토되었다.


부곽에서는 12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크게 두 개의 군으로 나뉘어 부장되었다. 북동쪽에는 토기군이 중첩되어 부장되었는데, 기본적으로 호류와 고배형기대 세트들을 중심으로 북동과 북서쪽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고배류가 부장되었다. 여기에 등자·재갈·교구·도자 등의 철기류가 뒤섞여 출토되었다. 단벽 가까운 쪽의 이들 토기군 위에서는 철제 판갑과 투구가 출토되었다. 장경호류 안에서는 패각·어골·닭뼈 등이 담겨지기도 하였다. 남서쪽의 공간에는 남서단벽 가까이에 2상의 장경호와 발형기대 조합과 소량의 철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많은 부분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 중 북동쪽 토기군에 가까운 중앙부에서는 말 투구를 비롯한 재갈·등자·안장·행엽·마령·교구 등의 마구 일괄품이 원래의 착장 상태에서 내려앉은 모양으로 출토되었다. 아마 빈 공간에는 말이나 순장자와 같은 유기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 투구는 우리나라에서 완형의 실물자료로서 최초로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전체적으로 갑주나 마구류 및 무기류 등에서 최신식 유물이 토착형식의 것과 함께 출토되어 금동관으로 대표되는 이 고분 피장자의 신분과 그 위상을 잘 나타내준다. 출토된 이단투창고배가 모두 신라양식의 것이어서 이 무덤을 기점으로 복천동유적이 신라에 완전 편입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었으나 이보다 늦은 시기의 고분에서 토착양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도 한다. 


출토된 금동관과 삼루대도 및 마구 등의 신문물은 이후 신라에 수용·정착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이 신라의 귀족문화 창달을 선도한 역할은 주목된다. 이 고분의 조영 시기는 고구려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영남지역에서의 새로운 변화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남정 이후 일정 기간이 경과된 5세기 전반 또는 중엽에 비정되고 있다.(김두철)


참고문헌

동래 복천동고분군Ⅰ(부산대학교박물관, 1982·1983), 부산지역 고분문화의 추이(김두철, 항도부산 19, 부산시사편찬위원회, 2003)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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