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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서예가 이완용] (6) 여유는 있었으나 절박함이 없던 삶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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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평상심은 도道였는가 6>

하소기 글씨


앞서 그가 추사체를 따르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고 하긴 했지만,

기실 근대 한국의 다른 관료나 문인들 작품을 보아도

추사체보담은 안진경체, 조금 더 엄밀히는 안진경을 깊이 공부해 일가를 이루었던 청나라 말기 서가 하소기(何紹基, 1799~1873)의 글씨체(그림 1)를 따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완용이 안진경체를 쓴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과 이완용이 구분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 또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나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 1861~1939)처럼 당시 내로라하는 망명객亡命客들은 으레 생계를 위해 서화를 그려 팔곤 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쓰고.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쓰고, 답답해서 쓰고…

하지만 이완용은 그런 정치적 공백기가 없었다.

때문에 그의 글씨는 매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오自娛하기 위해, 또는 자랑하듯 쓰고 뿌린(다른 표현이 생각이 안 난다) 것이 대부분이다.

여유 있게 글씨를 쓸 수 있었던 대신에 절박함이 없었다고 할까.

이 사실이 그의 글씨를 미술사적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준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또 한편으로,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처음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그림 2)의 서부書部 심사에 무려 4회나 참여한다.

‘조선귀족 영수領袖 후작 각하’시니 일종의 명예직으로 총독부가 추천해 밀어 넣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명예직도 명예직 나름, 그걸 받아쓴 사람이 충분한 권력과 자기 눈을 지니고 이를 휘두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동안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에 ‘참여’한 한국인으로는 해강 김규진, 성당 김돈희, 그리고 좀 뒤의 이당 김은호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이 주로 이야기되어왔다.

이완용도 물론 언급되긴 하지만 별로 그 뒤를 얘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과연 이완용이라는 인물이 글씨 쓰는 이들의 세상에 드리웠을 그림자를 그렇게 없는 듯 있는 듯 넘겨도 될까?

앞서 김은호도 증언하였듯이, “당시 귀족들 중에서는 가장 붓글씨를 잘 썼”고, “일본 서도전람회 미술전에 출품”도 했던 ‘작가’ 이완용의 그림자를 말이다. 

이완용은 4년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로 앉아있었다.

그동안 이른바 ‘선전鮮展’ 서부에 응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선호하는 글씨체를 연구해 작품으로 소화해낸다든지 하지 않았겠는가.

성당 김돈희나 해강 김규진 같은 경우는 그런 이야기가 있고 실제 도록에 실린 입선자 작품으로도 증명된다.

또, 아무리 높으신 귀족 나으리라도 일본에서 심사차 오는 다구치 베이호(田口米舫, 1861~1930) 같은 서가와 만나면 연회석상에서 즉석 휘호도 하고 술 한 잔 같이 안 마셨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유행하는 서체도 눈에 익히고 하면서 자기의 서세계書世界를 넓히는 일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런 점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면 한국 근대미술사의 퍽 흥미로운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그의 글씨 솜씨나 친일 행적과는 별개 이야기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완용이 작품을 냈고 김규진과 김돈희가 상을 탔다는 일본 서도전람회 미술전은 도대체 어떤 전람회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누구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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