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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경도京都 평등원平等院과 봉황당, 그리고 봉황

by taeshik.kim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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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발음을 존중해 그 표기 역시 그에 맞추어야 한다는 외래어 표기법 대원칙을 존중은 하고 싶으나, 한자어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점점 나는 그 효용성을 의심하는 단계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平等院만 해도 평등원이라 해야 그런 대로 의미가 들어오지, 물 먹은 냄새 좀 낸다고 びょうどういんん 뵤도인, 더 가깝게는 뵤우도우인, 혹은 뵤~도~인이라 읽거나 적는다면 그 의미가 쉽사리 다가오겠는가?

그것이 위치하는 광역자치단체만 해도 京都府인데 이를 교토후라 읽거나 적는 것보다는 경도부라 해야 의미가 더 확연하다. 경도란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이라는 뜻이요, 이 경우 京은 都와 의미가 유사한 말로 보거나 혹은 great라는 뜻이 별도로 있으므로 그리 볼 수도 있다. 

평등원은 저 교토부 남부에 치우친 우치시宇治市(우지시) 중에서도 연화蓮華라는 데 있는 불교 사찰이라, 우리한테 익숙한 寺라는 말 대신 院이라 한 내력도 있을 것이니, 보통 院이라고 하면 역참시설, 그러니깐 호텔 혹은 모텔을 겸하는 데를 말한다. 우리의 경우 지금은 이런 이름을 붙이는 사찰은 없으나, 고려시대만 해도 혜음원이니 해서 부지기로 전국, 특히 교통 요충에는 산발한다. 
 

평등원이 있는 우치. 경도와의 상관 위치를 보라.

 
그것이 자리한 宇治란 우주의 치소라는 뜻이니 개뻥이요, 더 좁은 구역을 연화蓮華라 하니 불교 색채 물씬함을 알겠으니 저 말에서 대뜸 연화대좌蓮華臺座를 떠올리지 않겠는가? 

우리도 산중 사찰은 무슨 산을 앞세워 문수산 축서사 이런 식으로 이름붙이곤 하는데, 일본 역시 마찬가지라 이 평등원은 그 진산이 조일산朝日山이라, 대뜸 아사히신문이 떠오른다.

예서 봉안하는 여러 불교 신도 등급이 있어 오야붕이 있기 마련이라, 이 평등원은 그 오야붕적 자리를 아미타여래阿弥陀如来가 정좌한다.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이 익숙하나, 이 경우 관세음은 대체로 아미타 협시불이다. 

아미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우리가 사는 이곳 염부제 절대 존엄인데 견주어,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분이라, 그런 까닭에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에서 유래하는 저 분을 극락極樂이라는 말로 번안하곤 하니, 그래서 사찰 전각 중에 아미타전, 혹은 그 줄임인 미타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극락전極樂殿 혹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데는 볼짝없이 아미타불이 한가운데를 정좌한다. 

이 서방극락정토가 표방하는 정신이 혹 절대 평등이 아닌가 하는데, 바로 이에서 비롯해서 평등원이라 이름하지 않았나 하는데, 저 평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는 볼짝없이 이 세상은 말세다 라는 이른바 말법末法 사상이 판을 치는 시대라, 이런 세상일수록 이 세상을 한 방에 끝내줄 구세주 출현을 열망하게 된다. 
 

평등원 아미타불. 내부 사진 촬영을 불허하나?

 
이곳이 위치한 데가 당시 왜국 도읍 경도京都의 남쪽이라 했거니와, 이런 교외에는 예외없이 별장 같은 데가 있기 마련이라, 바로 이 별장이라는 지정학적 특징에서 院이 비롯한다. 이 평등원은 겐지모노가타리 원씨물어 源氏物語 중에서도 '우치 십첩 宇治十帖 무대가 되기도 하거니와

평안平安時代 초기 이래 돈 많고 권력 높은 놈들 딩가딩가하는 땅이었다. 평등원이 들어서기 이전 그 땅에는 아차원씨嵯峨源氏의 좌대신左大臣인 원융源融이 경영한 별장이 있다가 그것이 훗날 양성천황陽成天皇과 곧이어 우다천황宇多天皇으로 넘어가고,  주작천황朱雀天皇 시절에는 그 이궁離宮인 우치원宇治院이 되었다가 우다천황 손자인 원중신源重信을 거쳐 장덕長徳 4년, 998년에 섭정攝政 등원도장藤原道長의 별장인 우치전宇治殿이 되었다고 한다. 

도장의 아들 관백関白 등원뢰통藤原頼通이 영승永承 7년(1052)이 되자 당시 유행하던 말법 사상에 따라 우치전을 마침내 사원으로 개조하기로 결심하니, 예서 문제는 대빵을 모셔와야 하는데 하필 경도 다른 절 평등원平等院이라는 절에서 주지를 하던 명존明尊이라는 스님을 모셔왔다는 것.
 

봉황당 중당. 오른쪽 왼쪽에 부속 회랑이 있음을 본다. 아미타불 불쌍하다. 그래서 불상인지도. 얼굴만 내민다. 저것이 불교 취지에 맞는가? 감옥이다.

 
물주는 자신이 만들 사찰 이름을 평등원이라 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같은 이름 사찰이 같은 경도에 두 개나 존재한다는 걸 용납하기는 힘들었으니, 문제의 평등원 주지를 모셔오는 대신, 압력을 넣었는지 어땠는지 지 사찰은 평등원이라 하고는 본래 사찰은 이름을 바꾸게 했으니, 그래서 본집은 원만원円満院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만다.

이 평등원은 그 자체 본사는 아니었으므로 원성사園城寺라는 본사의 말사로 들어가며 경내 서쪽에 있던 현신사縣神社를 진수사鎮守社로 삼는데, 이는 우리한테 익숙한 개념으로는 어느 집안 원찰 관계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본당本堂에는 본래 대일여래大日如来를 안치하고 이듬해 천희天喜 원년, 1053년에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전각을 마련한다. 이것이 시대가 흘러 미타전이 본당이 되었으니, 묘하다 하겠다. 봉황당鳳凰堂은 바로 이 아마티타전이다.

봉황당이라는 명칭은 훗날 붙은 이칭이며 당시 기록을 보면 아미타당阿弥陀堂이라 하거나 어당御堂이라 했다. 간단히 말해 극락전이다. 그 건물 수미단須弥壇에 감입嵌込한 연보延宝 8년(1680)작 금동판에 "平等院鳳凰堂"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봉황당이라 일컬었음을 본다. 
 

이것이 부처님한테 할 짓인가?

 


이곳에 봉안한 본존 아미타여래좌상阿弥陀如来坐像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봉황당은 중당中堂 북익랑北翼廊 남익랑南翼廊 미랑尾廊의 4개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치지阿字池라는 연못 중앙 섬에 동쪽을 정면으로 삼아 아미타불은 안치하는 중당中堂이 자리한다. 그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익랑北翼廊과 남익랑南翼廊이 인접하며 중당 서쪽(곧 뒤안)에 인접해서 미랑尾廊이 들어섰다.

봉황당 주변 중도中島와 주변 연못은 1990년 이래 발굴조사 결과 큰 옥석을 깔아채운 평안시대 주빈洲浜이 출토함으로써 이것이 창건 당시 그것임이 확인됐다. 

봉황당은 건립 당시에는 나무 기와를 쓴 목와즙木瓦葺이었으나 대략 반세기가 흐른 1101년에 수리하면서 점토와粘土瓦인 총와즙総瓦葺으로 바꾸었다. 
 

왼쪽이 본당. 오른쪽이 미랑이라 하는데, 지들 맘대로 붙인 것이다.

 
이 봉황당 중당 용마루 남북 양쪽 끄터머리 치미를 장식한 봉황鳳凰 1쌍이 있다. 금동제다. 북쪽 봉황이 総高 235.0 cm、像高 98.8cm、総幅 34.5cm인데 반해 남쪽 봉황이 総高 228.8cm、像高 95.0cm、総幅 44.5cm로 차이가 진다.

이 점이 영 수상하다. 짝째기기 때문이다. 극락전 창건 당시에 제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러 모로 미심쩍은 데가 있다. 

조사 결과 머리·몸통·날개·다리를 별도로 만들어 못으로 고정 조립했다. 일부 도금이 있지만 현재는 전체가 구리 녹으로 덮인 상태다.
 
***
 
이 블로그 필자이신 신동훈 선생이 이 평등원 봉황과 관련한 글을 올렸기에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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