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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Liu Renyuan Monument left by Tang China on Korean Peninsula / 劉仁願紀功碑 / 유인원 기공비

by taeshik.kim 202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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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asure

Monument for Liu Renyuan of Tang China, Buyeo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扶餘唐劉仁願紀功碑

 
Classification : Treasure

Name of Cultural Properties : Monument for Liu Renyuan of Tang China, Buyeo

Quantity : 1 monument

Designated Date : 1963. 01. 21

Age : Silla Period

Address : Buyeo National Museum, 5, Geumseong-ro, Buyeo-eup, Buyeo-gun, Chungcheongnam-do

 

Front side

 
This monument was built to commemorate the contribution of Liu Ren-yuan, a commander of Tang China.

It is 3.35m high and 31cm thick, and its headstone is 114cm high and 133cm wide.

It was found broken into three pieces lying scattered on Busosan Mountain.

Upon its restoration, a small structure was erected over the monument, and it was moved to the Buyeo National Museum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The front parts of the main stone have been chipped or hewn off, and the roof stone is also damaged in places.

The inscriptions on both sides of the monument are barely legible due to the defacement.  

The main and roof stones were each made with a single block of stone. The roof is rounded without any angles.

The roof stone features carvings of six dragons (three rising upwards on each side of the roof), all of which appear to be coiling around themselves in a struggle to seize the magic stone depicted at the center of the roof stone.

This type of image was inspired by the splendid style of the early Tang period. 

 

Its side

 

The inscription consists of two parts: one concerns the family background of Liu Ren-yuan, the other his life and achievements, including his activities after being selected by King Taejong of Tang.

He made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King Taejong’s invasion of Goryeo, attacking and destroying the Baekje Dynasty in alliance with Su Ding-fang in 660 and subjugating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carried out by its displaced subjects.

However, the description of his activities has been partially erased by the defacement.

According to Daedong geumseokseo (On the Monument of the Great East), the inscription was written by Liu Ren-yuan, but this cannot be confirmed. 
 
The monument was erected in 663 (the 3rd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mu of the Silla Dynasty), three years after the inscription was made on the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Jeongnimsa Temple Site.

Even though it is a monument to a commander of the Tang Dynasty, it is of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for Korea.

It records that King Uija of Baekje, the crown prince, and more than 700 of their subjects were taken as hostages to Tang.

It also tells the story of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and the ruined capital. 
 
 

Side and back

 
보물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Monument for Liu Renyuan of Tang China, Buyeo

나당연합군 일원으로 백제를 침공한 당唐나라 장수 유인원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 부소산 중턱에 있었다.

행적을 기록한 몸돌[碑身]과 용 6마리가 새겨진 머릿돌[螭首]을 한 돌로 제작한 전형적인 당나라 형식의 비석이다.

반면 거북 형태의 비 받침이 별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유인원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비이지만 의자왕과 태자,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백제 멸망 과정과 부흥운동의 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 설명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 모습 등이 기록되어 당시 상황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 補 ***
 
유인원은 자字가 사원士元이다.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으로 옛 백제 땅에 다섯 도독부가 설치되었을 때 낭장郎將으로 도성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때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주도한 백제 부흥운동군한테 도성에 포위당하지만 유인궤劉仁軌가 거느린 당군과 신라군한테 구원 받기도 했다.

생애 부분 내용은 주로 그가 당 태종한테 발탁된 이후 활동상과 벼슬 내력을 적었다.

645년 당군에 의한 고구려 정벌 때 공적을 세워 우무위봉명부좌과의도위右武衛鳳鳴府左果毅都尉에 제수됐으며, 647년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따라 9성철륵九姓鐵勒을 안무하기도 했다.

651년과 657년에도 각각 철륵을 안무했으며 659년 토곡혼土谷渾과 토번土蕃을 선무宣撫했고, 660년 우이도행군자총관嵎夷道行軍子總管으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 멸망시킨 뒤 도호겸지유진都護兼知留鎭으로 백제 옛 땅의 민심을 다스리면서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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