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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경상도 지역 저수지의 특수성

by taeshik.kim 201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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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한반도는 저주받은 땅이라 한다. 4계절 변화가 뚜렷하다지만, 이게 지랄 맞아 여름은 열라 덮고 겨울을 열라 춥다. 봄 가을은 잠깐이라, 실은 계절은 여름과 겨울 두 가지밖에 없다. 




한반도 전체를 통털어 강수량이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게 참말로 지랄맞아서 올때는 쌔리 붓고 안올 때는 가랭이 쩍쩍 갈라지는 형국이라, 쓸모없는 강수량 천지다. 겨울에 눈이 좀 온다? 겨울철 눈은 강수량에는 전연 도움이 되지 아니하니, 한겨울 눈은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증발해 버리고 만다. 강설로 강우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경우는 늦겨울, 봄에 내리는 함박눈밖에 없다. 




이 중에서도 경상도는 더 지랄 맞으니, 경상도 땅 전체는 분지다.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북쪽으로 거대한 소백산맥 태백산맥이 버티고 섰으니, 이게 서풍, 혹은 북풍, 혹은 동풍이 주는 강우나 강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 소백산맥 넘다가, 태백산맥 넘다가 다 흘려버리고 만다. 


이런 분지 땅 경상도에 오직 비를 선사하는 때가 남풍이 불 때이니, 남쪽은 비교적 그래도 뚫린 까닭에 그래도 이쪽이 주는 혜택은 그나마 본다. 한데 이 경우에도 지랄 맞은 지형이 있으니 지리산이다. 남해안에서 상륙하는 태풍은 거의가 지리산에서 막혀버린다. 다행해 지리산을 통과하는 태풍이 있는데, 이건 뭐, 하도 간만에 내리는 비라, 와장창 쏟아버리니 온 국토가 물난리가 난다. 




한반도는 저주받는 땅이며, 그 땅 중에서도 경상도는 더욱 저주받은 땅이다. 평야는 구경할 데가 없고, 온통 산골이라, 예서 관건이 바로 천수답과 저수지다. 나는 언제나 태풍은 플러스마이너스를 내면 플러스가 많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이 엄청난 것도 사실이지만, 경상도 땅은 이 태풍이 불어줄 때, 그때 가두어 놓은 물로 1년을 버틴다. 이 1년을 버티는 힘이 바로 천수답이요 저주지다. 




따라서 경상도에는 크고작은 저수지가 다른 지역보다 특히 발달하게 되는데, 이런 지정학적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는 역사문화사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검출한 신라시대 목간은 앞으로 연구성과에 따라 그것이 말하는 가치가 차츰 드러나겠지만, 그에서 분명 제堤 혹은 제상堤上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저수지 운영과 관련하는 문서 일종임은 분명한 듯하다. 


나는 언제나 박제상朴堤上 혹은 김제상金堤上이라는 이름 표기를 보고서는 왜 하필 이 친구 이름 표기가 저런가 하면서, 그 자신 혹은 그의 조상 혹은 그의 가문은 틀림없이 수리조합장 혹은 수자원공사 사장을 대대로 역임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혀갔거니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어미 아비가 그런 저수지 둔덕에서 봄날 만나 알콩달콩하다가 그만 애를 덜커덩 배어서 낳은 아이라 해서 그리 이름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소백산맥 기슭 경상도 땅 산촌에는 골짜기마다 저수지 없는 데가 없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거니와, 나는 이런 저수지들을 지금이라도 일괄 조사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저수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관의 통치력과 더불어 공동체 자치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했는데, 그 저수지에서 물을 받아야 하는 논 소유주나 소작인은 해마다 저수지로 물을 대기 위한 도랑을 쳐야 했고, 그 도랑이 홍수로 날아가면 울력이니 뭐니 해서 대규모 공사를 해야 했다. 


저수지는 저수지 나름대로 문제가 없지는 아니해서 1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준설을 해야했으니, 그렇지 아니하면 뻘이 쌓여 올라서 저수지 기능을 상실하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런 저수지를 통한 농경 전통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근대의 유산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나는 저 멀리 신라시대, 더 나아가 그 원류격들이라는 삼한시대, 더 나아가서는 청동기시대라고 해서 근간에 변화는 없다고 본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저수지는 큰 물이 한번 져야 철철 넘쳐나기 마련이라. 다만, 물이 넘쳐나면 저수지 둑이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그때마다 봇도랑 물을 조절을 해야 했다. 그 저수지 물이 얼마나 농경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젖줄이었으니, 그렇다 해서 그 젖줄이 주는 물이 풍부했느냐 하면 전연 그러지 못해서 언제나 물은 모자라기만 했다. 


지금의 경상도 산골 모든 골짜기마다 저수지가 적어도 하나씩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하늘이 두쪽나도 변함이 없다. 그것이 저 멀리 신라시대에도 심각한 물관리 고민이었음은 무엇보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문서들에서 우뚝하게 발견할 수 있거니와




그 저수지가 과연 한반도 문화사에서 무엇이며 

나아가 그 저수지는 누가 만들었으며 

더불어 그 저수지는 어떻게 운영하며 관리했는지 


이런 측면들에 대한 여러 고찰이 있었으면 싶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살핀 관련 글들에서 내가 말한 저런 그 어떤 고민도 없이, 오직 비석 혹은 목간에 적힌 글자만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이번 경산 몽둥이 목간만 해도 안 봐도 야동이라, 이런저런 통로로 엑스레이 판독사진 구해서는 한 글자라도 남이 못 읽는 글자 밝혀냈다고 희열할 그 친구들 모습이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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