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해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둘째 진짜로 진흥왕 시대는 흔적이 없을 수도 있다.
어디 이야기인가? 경주 황룡사 이야기다.
우야둥둥 이 황룡사가 몽골 침략 때 전소되어 버리고 그 터만 앙상히 남았다가 물경 800년이 흘러 박정희시대 말기가 되어 발굴조사를 통해 그 절터가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으니,
그 황룡사가 실제로 사찰로 기능하던 시절을 황룡사라 한다면, 그것이 전소되어 현재에 이르는 시대는 황룡사지黃龍寺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황룡사지는 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일환에 따라 발굴조사가 착수된 이래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발굴조사가 있었으니, 그리하여 목탑이 있던 자리와 금당이 있던 자리, 그리고 강당이 있던 자리 등등이 대강은 면모를 드러냈다.
이 황룡사는 애초 진흥왕이 새로운 궁궐을 세우려다가 부실공사 납품비리 사태가 터져 그랬는지 우야둥둥 곡절을 겪다가 그래도 마침내 그의 재위 시대에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그러다가 선덕왕 시대가 되어 중국에서 AI 메타버스 공부하고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열라리 큰 목탑 하나 맹글어 보자 해서, 그걸 보완하는 것으로 대공사 1차 완성을 고한다.
그러다가 화재인가 벼락인가로 목탑이 막대한 피해를 본 경문왕 시대에 몽창 기존 목탑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목탑을 세우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열라리 하게 판 발굴조사는 황룡사에 어떤 역사를 아로새겼는가? 나는 고고학이라는 관점에서 개중 하나를 정리한다.
그렇게 무수히 파제꼈는데 놀랍게도 그 드넓은 황룡사지 어디에서도 진흥왕시대에 황룡사를 세웠다는 흔적이 없다!!!!
안 믿긴다고?
봐라! 어디에 황룡사가 진흥왕시대에 창건한 흔적이 있는지?
없다.
현재 밖으로 노출된 황룡사 골격이라 해서 노출된 것은 실상 고려 고종시대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개중에 진흥왕 시대 석재 등등이 섞여있겠지만, 이것이 진흥왕시대 증언이다! 고 내세울 만한 흔적은 도무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황룡사는 고려 고종 시대에 건립했다.
내가 아는 고고학 상식에 의하면 고고학적 결론은 이러해야 한다.
한데 이리 말하는 고고학도는 없다. 대체 왜 이럴까?
나는 이에서 고고학의 역설을 본다. 고고학의 자가당착을 본다.
그렇게 증거주의 내세우며 고고학적 진실은 오직 발굴성과로만 말한다는 그들이 스스로를 배반한다. 유독 황룡사지에서는 말이다.
고고학이 만능이 아니라는 말은 다른 누구보다 고고학도 스스로도 하지만, 그건 말뿐이요, 고고학 개설에 보이는 언설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요, 실제로 이 둘을 구분하는 고고학도를 나는 이 땅에서 본 적이 없다.
입 따로 말 따로 생각 따로 따로국밥이 응결한 총화가 한국고고학이다.
따라서 나는 고고학에 요구한다.
황룡사는 고려 고종이 세웠다고 지금이라도 선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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