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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고려의 교육열을 증언하는 고려도경의 구절들

by 초야잠필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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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民庶]
신(臣)이 듣기에, 고려는 영토[地封]가 넓지 않으나 백성은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선비[儒者]를 귀하게 여기므로, 고려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은 매우 많고 땅은 평탄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은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주군(州郡)의 토산물[土産]은 모두 관아[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商賈]들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都市]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泛愛]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간의 혼인에서도도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져註 001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民庶]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편(篇)의 맨 앞에 둔다.


진사(進士)
진사註 001의 명칭은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국자감(國子監)에 모이게 하여, 합시(合試)에서 약 400명을 선발한 후, 왕이 시(詩)·부(賦)·논(論) 세 부문[題]을 친히 시험[親試]하여 합격한 사람을 관리로 삼는다.

정화(政和)註 002 연간부터 학생(學生) 김단(金端) 등을 〈송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했는데, 〈송 황제의〉 은사(恩賜)를 입어 급제[科第]하였다.註 003 이로부터 선비를 뽑을 때는註 004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과거시험 성적[程試]의 우열(優劣)을 비교하여 고하(高下)로 삼았다.註 005 

이 때문에 지금은 유학[儒]을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중국을 흠모[向慕]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진사의 복식은 네 가닥 띠가 있는 무늬비단 두건[四帶文羅巾]을 쓰며, 검은 명주[皂紬]로 갖옷[裘]을 만들고 검은 띠를 두르고 가죽신을 신는다. 

토공·향공[貢] 등에 오르면 모자[帽]를 더 쓰고,註 006 급제하면 푸른 햇빛가리개에 노복(奴僕)이 끄는 말을 타서[靑蓋僕馬] 성안에서 노닐며 영광을 드러내도록[榮觀] 하였다.註 007


유학(儒學)
근래에 사신이 고려에 갔을 때 현종[王詢]이 임천각에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렀으며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어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의 사부(四部)의 책으로 채운 것을 알았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유관(儒官)을 뽑아 〈제도를〉 잘 갖추었고 학교를 새로 만들어[新敞黌舍], 매달 배운 책을 확인하고 계절별로 시험 보던[月書季考] 태학의 제도를 열심히 본받아 여러 유생을 급제시켰다.

위로는 조정에 관리들이 포진하여 위의(威儀)를 넉넉히 하면서도 문장[辭采]은 여유 있었고 아래로는 여염집[閭閻]과 누추한 거리[陋巷]에 경서와 책을 파는 서사(書肆)[經館書社]들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백성 자제는 함께 거처하면서 스승을 좇아 경서를 익혔으며[授經] 조금 더 커서는 벗을 골라 비슷한 부류끼리 절과 도관(道觀)에서 강습하였다. 아래로는 평민[卒伍]의 어린 아이들[童穉]까지도 시골 선생을 찾아가 배웠다.


아아, 훌륭하구나. 제후가 공(功)을 이루는 것은 사실 천자의 위령(威靈)을 빌린 것이고, 제후가 덕을 행하는 것은 사실 천자의 교화[風化]를 따르는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중국으로 따지자면 바닷가 귀퉁이에 있으니 제후국[侯伯之邦]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 문물(文物)이 이처럼 번성한 것은 그들 스스로 〈천자의 교화대로〉 조금씩 단련한 결과이니 과연 훌륭하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해와 달 등 삼신(三辰)은 원기(元氣)를註 012 빌려 나란히 펼쳐지지만 그 밝게 드러나는 현상이 곧 하늘의 밝음으로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초목 등 수많은 보초(寶草)가 원화(元化)에註 013 기대어 화려함을 뽐내지만 그 무성한 모습[葳㽔藿靡]이 곧 땅의 현상[文]로 되는 것과 같다.

저 나라로 말하자면 관리 선발 제도[取士之制]는 송[本朝]을 본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들은 대로 따르고 옛 것을 준수하였으니 작은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국자감〉 재학생 가운데 해마다 문선왕묘(文宣王廟)에서 시험을 보고 그 합격자는 공사(貢士)로 간주한다. 뽑힌 진사(進士)는 격년마다[間歲] 소속된 곳에서 한차례 시험 보는데, 합격해서 함께 공사가 된 사람[合格偕貢者]은 총 350여 명이다. 

공사[貢]가 되면 학사에게 영은관(迎恩館)에서 총시(摠試)하도록 명을 내려 30~40명을 뽑되 갑을병정무(甲乙丙丁戊)의 5등급으로 나누어 급제를 하사한다. 

〈이것은〉 대략 송의 성위제도[本朝省闈之制]와註 014 같다. 

왕이 친시(親試)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시부론(詩賦論) 세 가지를 이용할 뿐 시정(時政)을 묻는 책(策)은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 외에도 제과(制科)와註 015 굉사(宏辭)의註 016 경우도 있는데, 그 규정은 있지만 항상 시행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시부(詩賦)의〉 성률(聲律)을 숭상할 뿐 경학(經學)에는 깊이 힘쓰지 않으니, 그들의 문장(文章)을 보면 당(唐)의 폐단[餘弊]과 비슷하다.

고려시대 홍패. 천하의 이성계도 아들 이방원의 과거 급제에 감읍하여 울며 궁전을 향해 배례하게 했다는 그 홍패이다. 과거제가 굳건했던 나라들은 교육의 필요성은 가르칠 필요도 없다.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을 천년간 목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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