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13년인 1135년 일어난 '묘청의 난'은, 일찍이 단재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크게 주목했고, 그 이후에도 이에 관해 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런데, 고려 역사 속 한 해프닝이건 또는 한국사 물줄기를 비튼 사건이건, 이것을 어쨌거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내란'으로 본다. 그런데 이 묘청의 난이 자칫 동아시아 국제전이 될 수도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己未 宋遣廸功郞吳敦禮來曰, “近聞西京作亂, 倘或難擒, 欲發十萬兵相助.”
기미 송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와 말하길, “최근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평정하기 어렵다면 10만의 군사를 보내 원조하겠다.”라고 하였다.
묘청의 난이 한창이던 6월의 일이다. 이때의 송은 '정강의 변' 이후 양자강 남쪽으로 내려간 남송이다. 그런데도 10만 군사를 보내주겠다...이에 대한 고려 조정의 답변은 9월에 있었다.
乙亥 吳敦禮還, 王附奏曰, “西京之賊, 已殲渠魁, 餘黨嘯聚, 據險自固. 欲速攻破, 慮多殺傷, 按兵圍城, 以待其降, 賊勢日窘, 破在朝夕. 竊念, 海外小邦, 邊鄙細故, 豈足上煩威靈. 故不敢控告. 今特遣使, 問助兵可否, 雖上感大朝字小之意, 但理有不便, 難以承當. 況海洋萬里, 險不可測, 天兵東下, 恐非便宜, 所下指揮, 乞行追寢.”
을해 〈송의 사신〉 오돈례(吳敦禮)가 돌아갔는데 왕이 표문을 부쳐서 이르기를,
“서경(西京)의 적도들은 이미 그 괴수를 섬멸하였고 남은 잔당들이 무리지어 험한 곳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속히 공격해 쳐부수고 싶지만 살상되는 사람이 많을까 염려하여 병사들을 안무하며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적의 군세도 날로 위축되어가니 이제 곧 무너질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해외에 있는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변방에의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고 어찌 천자의 위엄[威靈]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감히 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원군의 파병 가부를 물어주시니 비록 상국에서 소방을 걱정해주시는 뜻은 황송하지만 다만 이치상 불편함이 있을 것이기에 뜻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해양길이 만리나 되고 험난함도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황제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오기에는 어려움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하달하신 지시는 거두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제 코가 석자인 송이 허세를 부리면서 "도와줄게 뭐, 그까이꺼!"라고 하니, 고려가 한껏 비꼬아주면서 "됐거든!" 하는 상황인 게다. 만약 송군이 서경에 왔다면? 금이 자기 턱밑에 송나라 군사들이 들어오는 걸 어서옵쇼 했겠는가. 고려도 말할 것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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