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열전 권 8에는 이자연이 입전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자연(李子淵)은 인주(仁州)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대관(大官)으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 당(唐)나라에 들어갔을 때, 천자가 그를 가상히 여겨서 이씨 성을 하사하였고, 〈그〉 자손들이 소성현(邵城縣)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인주이다.
이허겸(李許謙)이라는 자는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해졌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翰)을 낳았다. 이한은 이자연·이자상(李子祥)을 낳았는데, 이자상은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정종(靖宗) 초에 급사중(給事中)에 보임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문종(文宗) 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에 제수되었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왕이 그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으니 〈그에게〉 수태위(守太尉)를 더하여 주고 처인 낙랑군군(樂浪郡君) 김씨(金氏)를 대부인(大夫人)으로 삼았으며 아들 이의(李顗)는 군기주부(軍器主簿)를, 이호(李顥)와 이전(李顓)은 모두 9품직을 제수하였다.
후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를 더하여 주고 김씨를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으로 봉하였으며 의대(衣襨)를 하사하였다. 〈이자연은〉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승진하였다.
왕은 이자연의 공로가 높고 임무가 중하다 하여 다시 의대(衣襨)·은그릇·안장 달린 말(鞍馬)·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로 삼았다.
〈이때〉 주문을 올려 아뢰기를, “제술업(製述業)〈에 응시한〉 강사후(康師厚)는 10번의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갑오년(1054) 사면 조서의 예에 의하면 벼슬에 나가야[脫麻] 마땅합니다.
그러나 강사후는 유림랑 당인(儒林郞 堂引)이었던 강상귀(康上貴)의 증손인데, 당인은 곧 구사관(驅史官)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무자년(1048)에 제서를 내리시어, ‘전리(電吏)·소유(所由)·주선(注膳)·막사(幕士)·구사·문복(門僕)의 자손으로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율업(律業)·서업(書業)·산업(算業)·의업(醫業)·복업(卜業)·지리업(地理業)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혹은 전쟁터에서 큰 공을 이룬 사람들은 조정의 벼슬에 오르도록 허용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강사후는 벼슬에 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참지정사(叅知政事) 김현(金顯) 등 5명이 주문을 올려 아뢰기를, “강사후의 증조부 강상귀는 직책이 비록 당인이었으나 유림랑을 겸직하였고, 아버지 강서(康序)는 과거에 10번 응시한 후 벼슬할 수 있었습니다.
강사후의 10년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시 벼슬길에 나가도록 허락하옵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자연 등의 의논을 따랐다.
간추리면 이렇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크게 출세한 사람이다.
이때 이자연은 강사후라는 인물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위와 같이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강사후는 잡역 이속의 자손으로 10번을 과거를 치렀는데 급제하지 못하였다.
- 이 강사후에게 그의 증조부와 아버지도 벼슬길에 나간 것을 고려하여 벼슬을 주자는 논의가 있었다.
- 이때 이자연이 이를 반대하기를, 잡역 이속처럼 낮은 직역의 자손은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우기 전에는" 벼슬길에 오를수 없다. 라고 하였다.
강사후는 결국 이자연의 논의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는데, 이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 고려시대에 말단 관리의 자손들도 과거를 10번씩이나 반복해서 칠 정도로 응시는 자유로왔다는 점
- 일단 과거에 붙으면 그 출신이 무엇이건 간에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가 고려시대에 악세서리가 아니었다는 소리이다.
신분을 뛰어 넘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었기에 과거를 10번을 반복해서 본 것 아니겠는가?
고려사를 보면, 무신정권에 의해 문신들이 도륙당하기 이전, 과거제가 성립한 이후에는 열전에 입전된 사람들은 문신들의 경우 상당수가 과거급제자였다.
고려는 조선시대처럼 문과 급제자가 아니면 환로에서 기를 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문과 급제란 곧 출세의 보장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과거는 "귀족자제"에만 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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