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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못배운 한의 끝판 왕.. 과거 합격

by 초야잠필 202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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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를 "귀족제"로 본다면 그 사회에서 "과거제"란 결국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못 보게 하거나 거의 뽑지 않고 영달한 귀족들의 자제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겠다. 

이 때문에 고려는 전기에 이미 과거제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어 급제자를 배출하고 환로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과거 급제자였어도 "귀족사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결국 과거제는 요식행위였다는 선입견이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앞에 예를 든 강사후의 경우를 보아도 미천한 계급에서 급제자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하면 신분을 막론하고 환로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의 과거와 조선의 과거가 과연 얼마나 다른 존재였을지 의심스럽게 된다. 

과거제란 먹고 살 만한 집안 아들에게 열린 환로라기 보다 낮은 계층에서 이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갈 때 비로소 그 제도가 설치된 진면목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러한 과거제의 진면목을 고려시대에 이미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할 것이다. 

고려시대 과거의 위력을 알려주는 일화 중 잘 알려진 것으로 태종이 문과 급제 때 이성계가 보인 반응을 들 수 있다. 


태조는 본시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비록 군중에서라도 창을 놓고 쉬는 때면 유명한 선비를 청하여 경서와 사기를 논의하느라고 밤중까지 가지 않기도 하였다.

가문에 유학하는 사람이 없어서 태종을 배움길에 나아가게 하였더니, 태종이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종의 글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 내몸에서 나지 않았는가.” 하였다.

고려 우왕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태조가 대궐에 가서 배사(拜謝)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제학(提學)이 되니 태조의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서 관교(官敎 임명장)를 두세 번 읽게 하였다.

손님들과 연회할 때는 태종에게 연구(聯句)를 하게 하고, 매양 말하기를, “내가 손님들과 함께 즐거웠던 것은 너의 힘이 컸다.” 하였다.
《동각잡기》



태종은 16세 때인 1382년(우왕 8)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383년(우왕 9)에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하니 대단한 수재였다 할 것이다.

고려 말의 과거제는 절대로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잘 난 아들을 둔 태조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보면 실제로 춤을 추었을 수도 있겠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못배운 한"의 원조격이 태조 이성계였다 할만한데, 

바로 그런 "과거 등제"와 "못배운 한"의 클리셰는 1961년까지 이어져 저 유명한 한국영화 "마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사법고시가 폐지되기 전 그 원형이 바로 "과거제"였다 할 만한데, 이런 의미에서 사법고시의 폐지는 결국 천년의 전통을 버린 셈이라 하겠다. 

극 중의 마부 김승호는 조선 태조, 아들 신영균은 태종이라 할 만하다. 태조도 태종이 급제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홍패란 그만한 권위가 있었다 할 것이다. (1961년 한국영화 마부에서)



*** Editor's Note ***


이성계는 내가 계속 의심하지만 까막눈 혹은 그에 가까웠다. 군중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말은 왜곡이다.

그가 까막눈이었을 때 이방원의 급제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을 이해한다.

나아가 그 마누라 반응도 마찬가지다.

역성혁명 이후 경연을 하자는데 이성계는 거부한다. 난 늙어서 배워도 소용없다는 논리였지만 실은 까막눈이었기 때문이다.

이 까막눈한테 눈과 귀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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