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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27년(1073) 정월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법전[令典]을 살펴보건대 ‘공장(工匠)과 상인(商人)의 집안은 기술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니, 그들의 업(業)에 전념할 것이며, 관직에 올라 선비[士]와 나란히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군기주부(軍器注簿) 최충행(崔忠幸)과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양운(梁惲)은 모두 공장의 외손이며, 별장(別將) 나례(羅禮)와 대정(隊正) 예순(禮順)도 역시 공장의 적손(嫡孫)인데 스스로 조정(朝廷)의 관리[九流]을 흠모하여 그 업을 던져버리고 이미 조정의 반열에 올라왔으니, 다시 공장으로 충원할 수는 없사오나, 바라건대 각자 지금의 직책으로 제한하시고 <다른 직책으로> 옮겨 제수(除授)하는 것을 허용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신해년(1071)에 낭장(郞將) 충맹(忠孟)을 대장군(大將軍)까지로 제한한 전례(前例)에 따라 임용하는 것을 허통(許通)하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서성(中書省)에서 박주(駁奏)하기를,
“최충행 등은 큰 공적이나 재능이 없었는데도 자기 집안의 허물을 가려서 숨긴 채 억지로 관직의 품계[流品]에 들어왔으니, 변방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충맹의 예와 같이 논의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제서를 내리기를,
“청요직(淸要職)과 이민직(理民職)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전의 제서에서 말한 것과 같게 하라.”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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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선거지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공장 곧 '장이'의 후손으로 관직에 오른 인물이 있었을 뿐더러, 그들을 쫓아내 다시 장인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를 누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 같았으면 쫓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공장으로 충원'시키거나 노비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말이다.
숙종대 인물인 이만강이라는 노비는 어찌어찌 양반이 되어 과거에 급제해 꽤 높은 지방관 자리까지 올랐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다시 노비가 되고 만다. 그 인생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던지 정말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고려는 일단 들어온 이들의 상황을 인정할 뿐더러 그 한품限品 또한 꽤나 유연했다. 대장군은 3품직이니 차관급 정도 될까. 충맹이란 분이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대로라면 그 충성심이 으뜸이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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