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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그 사람이 사는 법

by 버블티짱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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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關北이라 불린 함경도 일대는 옛부터 무사들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 이유로 흔히 높고 험준한 산이 많은 자연환경, 여진족이 틈만 나면 쳐들어오는(원래 함경도 땅의 상당수가 여진족의 터전이기도 했으니까) 사회환경을 들곤 한다. 그런데 그 말인즉슨, 문인이나 예술가가 나타나기는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태어난 용흥지지龍興之地였음에도 조선왕조 500년 내내 함경도 출신 과거합격자는 드물었고 관료가 된 이들은 더더욱 적었다. 같이 차별받았음에도 관서關西 평안도와는 달리 19세기 함경도 문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받는 현실에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여러 모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장유승 선생님의 <조선 후기 서북지역 문인 연구>라는 논문을 참조바란다.
 
이런 모습이 180도 달라지는 게 이른바 근대 개화기의 일이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함경도에 경흥, 원산 같은 개항장이 생기면서 그 지역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그에 발맞춰 관북 출신 인사들이 조선 조정에 속속 기용되고, 이용익(1854-1907), 장박(1848-1921) 같은 고관이 등장했다. 군수 정도쯤 되면 두 손으로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다. 서북학회西北學會 같은 단체에 가입한 인물의 수도 과히 적지 않다. 개화바람이 유달리 함경도에 세게 불었다고 해야 할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말이다.
 
미술 쪽에서도 함경도 태생 서화가가 조금이지만 등장한다. 내가 다루어보고자 하는 수연 박일헌도 그에 속하는데, 몇 안되는 함경도 서화가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백송 지창한(1851-1921)이다. 백두산 자락의 고을 무산에서 살았다는 그는 청나라 하소기何紹基의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고, 먹의 짙고 옅음을 살려 꿈틀거리는 게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대한제국관보>, <동아일보> 등의 자료를 찾아보면 그는 1899년 경무관으로 임명된 뒤 1900년 6월 17일 정3품 자격으로 경부 서무국장警部庶務局長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敍任되었고,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무산군수를 지냈으며, 1915년에 무산군 참사參事 자리에서 해직된다. 1916년 순종에게 금강산 기행문을 바쳐 100원의 하사금을 받았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을 축하하는 시와 글씨를 보내기도 했다.
 
지창한의 글씨가 실린 &amp;amp;amp;amp;lt;동아일보&amp;amp;amp;amp;gt; 1920년 8월 14일자. "2천만 벙어리가 일시에 말을 하고, 4천만 장님이 일시에 눈을 떴네, 대소자大笑子 지창한"
 
지창한의 작품은 예전엔 퍽 귀했다고 한다. 이북 지역에서 활동했고 해방 전에 죽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한에는 작품이 드물었다는데, 요즘은 일본을 거쳐 들어온 작품들이 더러 눈에 뜨인다. 이 글씨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지창한은 글씨를 쓸 때 물기 있는 먹을 듬뿍 묻혀 뭉텅뭉텅 써내려가곤 하는데 이 글씨는 유달리 각을 잡았다. 비백飛白이 보일 정도로 획에 속도감이 있는데 다소 뻣뻣하다 싶은 느낌이다. 글쎄, 글의 내용 때문에 더욱 더 그렇게 여겨지는 건지도.
 
일제강점기 회령會寧에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아마 거기 회령 땅에 이시다테石立라는 이가 살고 있었던 모양으로(군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백송과 꽤 안면이 있었는지 하루는 좋은 종이를 구해 시 한 수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시 내용이 지금의 한국인이 보기엔 참 슬플 지경이다.
 
조선 북쪽의 요충지, 여기는 회령이라 鮮北要衝是會寧
높은 병영 차가운 나팔, 군사 소리 장하여라 高營寒角壯軍聲
흑룡강과 오산烏山은 어디에 있는가 黑水烏山何處在
복사꽃과 철마鐵馬는 삭풍에 우짖는구나 桃花鐵馬朔風鳴
 
설마 저기 나오는 오산이 경기도 오산은 아닐 것이고, 연해주의 도시 우수리스크를 얘기하는 건가 아리송하다. 복숭아꽃과 증기기관차도 좀 뜬금없고. 그나저나 이 작품을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서화가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그의 본심은 어디에 있었을까. 본심이 아니었다면 당시 그의 속내가 얼마나 복잡했을 것이며, 본심이었다면....글쎼. 참고로 다른 화가들, 예컨대 금강산인 김진우(1883-1950)처럼 지창한이 작품을 팔아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가 수연 박일헌처럼 1880년대 조-중 국경분쟁과 백두산 정계비 문제에 꽤 깊이 관여한 듯한 정황이 보인다는 것이다. 1909년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光緖 13)의 勘界 담판 때 한국 위원의 수행원이었던 前 茂山郡守 池昌翰을 조치하여 당시의 정황, 특히 李重夏가 1885년 담판에는 강경론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1887년에는 茂山에서 하류의 豆滿江을 국경으로 하는 것에 동의한 사정 및 土堆·石堆의 종말 점 紅土水源에 연접했다고 말하는 木柵의 유무 등에 관해 상세한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2년 앞서 1907년,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수행원이었던 자이며 지도를 작성하는 임무를 담당한 茂山 전 郡守 池昌翰이 鈴木 文學士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본인도 지도 제작 시 누차 청국병에게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부상당하였다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형적으로 왼쪽 손톱을 내보였다고 하였음. 
 
아래 사진이 바로 그 보고서다. 그나저나 얼마나 맞았길래 손톱에 그때까지 흔적이 남아있었을까? 혹 손톱이 뽑혔던 걸까? 그랬다면 그림 그리는 데 큰 지장은 없었을까?
 

이게 그 보고서다. 왼쪽에서 3째줄을 보면 同人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에서는 이걸 日人으로 보고 '일본인도 지도 제작시....'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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