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태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은 울릉도와 독도가 이사부 정벌 이래, 그러니 신라 지증마립간 이래 두 섬이 죽 한국 땅이라 했지만 웃기는 소리라
놀랍게도 울릉도는 고려시대 내내 고려 땅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리만치 철저히 한반도 밖에 위치한 별도 문명 문화권이었다.
고려사 권58卷 志 권 제12 지리地理3 동계東界 울진현蔚珍縣을 이르기를
본래 고구려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 때에 현(縣)으로 강등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置令].
고 하고는 그에다가 울릉도鬱陵島를 첨부하기를
현縣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고,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불렀으며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2년(511)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사두白吉士豆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에 왕이 울릉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날에 주현州縣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는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었는데, 가서 보고 와서 김유립이 아뢰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으며,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바다까지 10,000여 보步이고, 서쪽으로 향하면 13,000여 보이고, 남쪽으로 향하면 15,000여 보이고, 북쪽으로 향하면 8,000여 보입니다.
촌락 흔적은 7군데이고 석불·철종·석탑이 있습니다.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우산于山·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가 있다.
이로써 보면 울릉도는 고려로써는 있는둥마는둥 지들이 제발로 찾아오면 밥이나 먹여 보내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그 흔한 봉작 하나 내린 적도 없다.
고려 영토 밖이었으니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이는 현종시대에 동북여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뭍으로 상륙한 저 주민 일부를 비로소 백성으로 편제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명백하다.
울릉도가 한국사 영역에 편입되기는 언제인가?
공도空島 정책? 방기 포기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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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소굴로서의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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