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이 약탈경제 기반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그래서 유목민 비스무리한 족속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그네를 둘러싼 가장 큰 착란이 그들이 바다에 약할 것이라는 실로 막연한 생각이 점철하지만, 그들은 해전海戰의 명수였으며 이들보다 바다를 잘 이용한 민족은 동북아시아에서 찾기 힘들다.
그런 면모는 고려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마는, 주로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삼국시대 역시 그에 못지 아니해서 동해안을 치는 말갈은 예외없이 바다를 통한 침략이었다.
신라가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고 그곳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이 여진 혹은 말갈은 골치였으니, 동해를 주름잡은 그들의 해군력을 약화하고자 단행한 일이 바로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이었다.
신라가 왜 우산국을 쳤는지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당시 추세를 보건대 오직 여진만 있을 뿐이다. 기타는 우수마발이다. 무슨 어장 확보 차원이니 하는 말까지 나오지만, 당시가 원양어업을 할 때도 아니어서 성립할 수 없다.
우산국이 여진의 소굴이었고, 이 소굴을 무대로 걸핏하면 신라 변경을 들이쳤기 때문이지 딴 이유 없다.
그것을 간접으로 증명하는 증언들이 고려시대 여진 침략이라 했거니와, 나는 이를 역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계속 역설한다.
다시 말해 여진이 바다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침범하는 과정을 보면 역으로 신라가 동해안을 치고 올라간 힘을 알 수 있다 했거니와, 여진이 바다로 밀려내려왔듯이 신라 역시 바다를 통해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했다.
그 접점이 바로 울릉도였다. 이미 동해안 기준으로는 이미 울릉도를 훨씬 지나 지금의 원산만까지 일찌감치 진출한 신라로서는 그네들 감시망을 피해 울릉도로 스며들어 호시탐탐 그 배후로를 노리는 여진이 언제나 성가시기 짝이 없었으니,
참다 못해 결국은 지증왕 시대에는 아예 직접 점령을 해버리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 직접 지배가 어느 정도 실효가 있었는지, 혹은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여진 소굴로서의 울릉도는 고려시대에 그대로 재현하는데, 현종 9년, 1018년 11월에 "우산국于山國이 동북여진東北女眞에 노략질당해 농업이 피폐해졌으므로 농기구를 하사했다"하고,
그 이듬해 7월에는 "우산국 민호로 일찍이 여진 침략을 피하여 도망쳐 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는 것이 그 우뚝한 증거다.
나아가 같은 왕 13년, 1022년 7월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우산국 백성으로 침략당해 도망쳐 온 자들을 예주禮州에 거주케 하고 영구히 호적에 편입하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고 했으니, 앞선 기록을 볼 때 그네가 여진한테 쫓겨 뭍으로 도망쳤음을 명약관화하다.
아직 울릉도 일대 고고학 발굴조사가 충분하지는 못하나 보나마나 여진 흔적 잔뜩 나온다. 기존에 판 것들이 여진 흔적일 가능성도 내치지 못한다.
이사부 이전 울릉도는 여진 땅이었거나, 그네들 중간 기착지였다.
또 하나, 놀랍게도 울릉도는 고려시대 내내 고려 왕토 밖이었다.
간단히 말해 울릉도는 고려 영토가 아니었다. 제주도보다 훨씬 늦게 한반도 강토에 들어왔다.
독립왕조를 꿈꾸는 사람들은 울릉도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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