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견주어 고려시대가 적서 차별 양상이 극심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는 상대성 이론이라, 견주어 볼 때 그리 보인다뿐이지, 고려시대라고 적서차별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적서 문제는 결국 혼인 양태에서 비롯하는데, 더 구체로는 남자 한 명에 부인이 한 명인 1부1처제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적어도 기록으로 남은 흔적으로 볼 때는 철저한 1부1처제 사회였고, 남자한테 부인은 같은 시기에 한 명이 있을 뿐, 복수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어서 이쪽도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어느 인터넷 사전을 보니 "고려시대에는 두 명의 정실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서자를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서자를 적자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어떤 개새끼가 이딴 말을 씨부렁거렸는지 모르겠지만 헛소리다.
물론 이른바 일부 정통 역사학도가 그런 소릴 지껄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만, 제대로 공부를 못한 탓이니 넘기자.
아무튼 저런 말에 고려시대 왕건을 예로 들면서 저 많은 왕비는 도대체 뭐냐? 하거나 비단 왕건 만이 아니라 후대 고려시대 왕들도 무수한 마누라를 거느리는데 그건 뭐냐 하면서 마치 고려시대가 일부다처제 사회였던 것처럼 떠들지만 이 역시 개소리다.
마누라는 한 명밖에 없다! 물론 그런 본마누라가 일찍 죽거나, 혹은 바람 펴서 쫓겨나 새로 마누라를 맞으면서 한 왕이 여러 정식 마누라를 거느릴 수는 있지마는, 동시기에 남자한테 정식 부인이 둘 이상 있을 수는 없다.
고려 제13대 국왕 선종宣宗 왕운王運(1049)~1094)은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 사이에서 난 아들로 왕자로서 국원공國原公에 책봉되었다가 친형 순종이 재위 3개월 만에 요절하자 즉위해 11년간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그에게는 여러 비빈이 있었다. 개중 조강지처는 정신현비貞信賢妃 이씨李氏라 일컫는 여인이라, 인주仁州 사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는 이예李預라는 사람 딸이다.
고려사 이예 열전에는 선종이 막 국원공國源公에 책봉되었을 적에 그의 딸을 맞아들이니 그가 정신현비로 연화궁주延和宮主라는 딸을 낳았다고 했다.
이 연화궁주를 훗날 예종睿宗이 즉위하면서 비妃로 맞아들인다.
선종은 국원공 시절에 다시 첩을 받아들인다. 훗날 사숙태후思肅太后라 일컫는 인주 이씨李氏로,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석李碩의 딸로 연화궁비延和宮妃라 일컬었다.
이가 헌종獻宗과 수안택주遂安宅主를 낳았다. 선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넘버2인 첩이었다.
넘버1인 정신현비가 언제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뒤에서 보게 되듯이 남편이 왕이 될 시점에는 살아있기는 했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찍 죽은 듯하다.
그러니 자연 넘버 1 자리는 넘버 2인 연화궁비한테로 돌아간다. 정식 부인이 된 것이다.
이 연화궁비는 그 아들 헌종이 왕위를 잇자 높여서 당연히 자동빵으로 태후太后가 되고 그가 거처하는 건물 이름으로 중화전中和殿으로 높임을 받게 되고, 그것을 관리하는 정부 조직을 따로 두어 영녕부永寧府라 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있다. 아들 헌종이 유약한 까닭에 국사를 돌볼 수 없어 실제 왕국 통치는 엄마인 사숙태후가 했다.
아들 헌종이 죽으면서 숙종한테 양위하면서 당연히 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이제 뒤칸 골방 할머니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선종의 정식 부인을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예종 시대에 도래했다.
그 재위 2년(1107) 4월, 예종은 종묘에 선종 신주를 안치하면서 정신현비貞信賢妃를 부묘祔廟하려 했다. 핏줄로 보면 정신현비는 자기 마누라 엄마이기도 했다.
당연히 자신의 정통성 문제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마누라 엄마를 선종의 정식부인 언터처블 와이프로 공표하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이때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간관諫官이 아뢰기를, “정신현비께서 국원공비國原公妃가 된 연월年月이 오래지 않았습니다. 사숙태후께서는 공부公府의 빈嬪이 되고서부터 왕위에 오르시기까지[踐祚] 오래 계시면서 내조內助하시었고, 태자가 정통正統을 잇자 조정에 나아가 왕명을 칭탁한 지가 3년이었으며, 헌종께서 숙종肅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곧 옛 궁으로 물러나 살며 끝까지 덕을 잃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숙태후를 올려 부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차한 예종은 이럴 때 어느 군주나 쓰는 수법을 쓴다.
이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적서嫡庶의 구분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예전禮典을 상고詳考하여 아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간관들의 대답은 이랬다.
“춘추春秋의 의리에서는 나라의 임금이 즉위하여 1년을 넘기지 못하면 〈종묘宗廟에 있는〉 소목昭穆의 차례에 넣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임금마저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후비이겠습니까? 요청하건대 사숙태후를 올려 부묘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이 대목이 좀 갸우뚱하다. 이 말로 보면 조강지처는 정신현비가 아니라 사숙태후인 것 같다. 한데도 고려사 후비 열전에는 분명 정신현비가 먼저 기록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앞서 내가 말한 넘버 원투 순서가 바뀐다.
그 내막이야 혹 훗날 다시 따질 기회가 있을지 모르나 넘기기로 하고, 이것이야말로 고려시대는 철저한 일부일처제 사회이며 정식 부인은 한 명밖에 없다는 단적인 증언이다.
부묘가 무엇인가? 간단하다. 종묘에 왕과 함께 왕비가 신주가 들어가는 일이다. 그 종묘 신주에는 단 한 명만 들어갔다.
스물아홉에 이른다는 왕건의 부인? 웃기는 소리, 종묘에는 조강지처 딱 한 명만 들어갔다.
그것이 禮이며 법칙이며 정언명령이라 왕조차 이를 어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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