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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고로칸 홍려관 鴻臚館 이란 무엇이며 특히 후쿠오카의 그것은 왜 중요한가

by taeshik.kim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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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려관유적전시관 鴻臚館跡展示館

鴻臚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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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흔히 일본어 발음 그대로 따서 그게 뭔가 되는양 떠드는 이들이 입에 올리는 고로칸이란 곧 홍려관鴻臚館을 말하며, 그것을 일본어로 こうろかん이라 읽는 데서 말미암음이니 일본어 발음에 더 충실한 표기는 코로~칸 정도다.

저것이 일본 고유어가 아니요 실상 鴻臚館에 대한 일본어 발음 표기임을 단박에 아니, 저걸 우리는 홍려관이라 한다는 점을 기억했음 싶다.

나아가 저 홍려관을 생각할 적에 또 유의할 점은 저것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려관은 간단히 말하면 외국 사절 접빈관이다. 조선시대 관념으로 보면 지금의 서대문에 있던 태평관太平館 정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홍려관은 외국 사신 관련 접빈을 담당하는 시설에 대한 일반명사이니, 이건 견주건대 호텔이나 여관이라는 말과 같아, 홍려관은 여관 호텔이라는 뜻이라, 그것이 있는 지역 이름을 따서 예컨대 서울홍려관 평양홍려관 의주홍려관 정도라 할 적에 비로소 고유명사를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저 홍려관은 도대체 본래 무엇이건대 저런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이를 위해 호텔 등등을 겸하는 수식어인 館을 떼어버리고 鴻臚 홍려 라는 말을 생각해야 한다.

홍려관 복원 상상도



저 말은 우리라고 안 쓴 건 아니어서 옛날엔 자주 사용했으니, 현해탄 건너 저짝에서 유별나게 애용한 말이라, 애초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말이다.

홍鴻이란 크다, 것도 대따시 크다[大]는 뜻이요, 려臚란 피부를 의미하는 육[肉]달월이 의미를 제한하는 부수자로 사용된 데서 엿보듯이 애초에는 피부 혹은 살갗을 의미했으니, 설문說文에서 이 글자를 수록하며 풀기를 "皮也"라 했으니 피부를 의미함을 본다. 나아가 피부 중에서도 배 앞쪽을 지칭하기도 했으니 광운廣韻에서 이르기를 "腹前曰臚"라 한 것이 그 증거다.

이것이 명사로서 원초적인 의미이겠지만, 동사로 전용해서는 여러 뜻을 지니지만 간단히 무엇인가를 진술한다 혹은 서술한다 말한다는 뜻이라, 옥편玉篇에서 이 글자를 "陳也"라 했고 광운廣韻에서는 "陳,序也"라 하고 이아爾雅 석언釋言에서는 敍也라 한 것이 그 증거다.

바로 이에서 저 홍로鴻臚라는 말이 파생하는데, 저 이아 疏에서는 "以禮陳敘於賔客也"라 했으니, 이 말은 예로써 빈객한테 서술한다 진술한다는 뜻이니, 뭐 간단히 이해하면 예의와 정성을 다해서 빈객을 대접한다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사기史記 육국표六國表에는 "臚於郊祀"라는 말이 나오는데 종묘 제사에서 정성을 다한다는 뜻 정도다.

출토유물들



이런 뜻에서 말씀을 전한다는 뜻도 당연히 파생하니 정운正韻에서 臚라는 글자를 "傳也"라 푼 것이 그 일례다.

홍려鴻臚란 간단히 말해 예로써 주로 외국 사절을 정성을 다해 대접한다 이런 뜻이다. 물론 저에는 황제 같은 지고한 절대 권력자가 신하, 특히 제후나 외국 군주(사절)를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서 잘 타이른다는 뜻도 있다.

이런 외국 사절 혹은 변방 제후 접빈 역할을 하던 데를 漢나라에서 특히 鴻臚寺라 했으니, 이 경우 이 글자는 홍려시로 읽는다. 寺는 불교 도입 이후에는 사찰 일반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지만, 그 이전, 그리고 불교 도입 이후에도 관청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예외없이 그 발임이 '사'가 아닌 '시'다.

홍려시는 그런 까닭에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다. 후한 시대에 이 관청 우두머리를 대홍려大鴻臚라 했으니, 지금의 외교장관에 해당하는 그를 두고 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서는 "大鴻臚一人,中二千石"이라 했으니, 대홍경은 한 사람을 두고 그는 녹봉이 2천 석에 상당한다 했다.

홍려관鴻臚館은 곧 홍려시鴻臚寺다. 물론 엄밀히 홍려관은 홍려鴻臚하는 일을 맡은 시설이라는 뜻이 강해서 그 자체 관청을 의미하는 홍려시와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유적 전시관


고대 일본에서 홍려관鴻臚館은 일찍이 모습이 보이니, 아스카飛鳥・나라奈良・헤이안平安시대를 거쳐 죽 그 흔적이 기록으로 남았다.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오는 사절단을 접대하는 영빈관迎賓館이지만, 이건 대외 관점에서 그렇고, 일본 왕실 역시 저 지역으로 사절을 줄기차게 파견했으니, 그런 국내 사절이 외국으로 나갈 때도 이용한 시설이 바로 홍려관이다.

중국에 보내는 사절단을 보통 견당사遣唐使라 하고, 신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견신라사遣新羅使 등으로 표현했다.

홍려관은 일반명사라, 문헌을 보면 지금의 교토에 도읍을 정한 헤이안시대에도 그쪽에 있었고 난파 혹은 나니와로 일컬은 난파難波에도 있었지만 그 실제 흔적이 확인된 곳은 현재까지 일본에서는 오직 축자筑紫, 곧 지금의 후쿠오카 지역 홍려관鴻臚館뿐이다.

이곳 홍려관이 모습을 드러낸 시점은 688년이라, 그때는 축자관筑紫館, 쓰쿠시노무로쓰미 つくしのむろつみ 라고 했다. 헤이안시대가 되어서는 대당對唐 외교를 관장하면서 홍려시鴻臚寺, 코로지 こうろじ와 더불어 '鴻臚館'이라 개칭했다.

따라서 이 후쿠오카 홍려관은 1047년 대화제로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기 전까지 대략 400년 간 일본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공식 창구이자 유일한 무역항으로 기능했다. 고대 일본이 세계와 접촉한 유일한 공식 창구가 홍려관이었던 것이다.

전시관 전경


이 홍려관 유적 발견은 한 의학도 집념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 鴻臚館은 지금의 박다구博多区 하오복정下呉服町 부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정大正시대가 되어 구주제국대학九州帝国大学 의학부 교수인 중산평차랑中山平次郎이 이 점을 의심하면서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축자관筑紫館에서 읊은 만엽집万葉集 수록 노래를 주목하면서 그것을 의심하는 한편, 그러는 와중에 옛 기와와 도자기 파편 등을 후쿠오카성福岡城 안에서 발견하고는 축자관은 福岡城 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다가 1987년, 소화 62년, 평화대구장平和台球場의 외야석을 개수하는 공사에서 유적 흔적이 잡혀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지고 현재까지도 줄기찬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고대 무역 거점답게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하북성이나 절강성 호남성 등지에서 생산된 중국 도자기나 한반도 신라 고려 제품, 그리고 서아시아 계통 유물이 풍부히 발견됐다.

각지에서 보냈음을 보여주는 물품 꼬리표인 목간을 통해 교역 양상을 추적할 수 있게 됐으며, 더불어 뒤딱이로 쓴 주목籌木도 발견했다.

길비진비吉備真備라든가 최징最澄、공해空海、원인円仁 같은 일본인들이 중국으로 오갈 적에 이용한 곳도 축자관이었다.

입장료가 없다.

현지에서는 관람시설과 현장을 노출한 유적 등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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